구조로 읽는 삼국지(三國志) | 제7장 적벽대전 (2-2)
허도(許都) 조정(朝廷)에서 자신이 설계한 새로운 운영체제를 통해 제국 시스템을 복구한 조조. 그러나 조조가 형주에서 처한 상황은 그의 예상과 달랐고, 어느새 조조는 공세적 위치가 아닌 수세적 위치에서 형주 북부를 방어하기 위해 적벽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손권(孫權)의 총지휘관이었던 주유(周瑜)와 함께 조조(曹操)의 적벽(赤壁) 방어선 구축을 파악한 제갈량(諸葛亮)은, 적벽의 강폭이 좁고, 따라서 유속이 상당히 빠른 지역이었음에 주목했습니다. 또한 이미 병력 손실이 발생한 상황에서, 형주(荊州)의 군사력까지 온전히 흡수하지 못한 조조가 실제 적벽 방어선에 배치할 수 있는 병력 규모는 3만여 명 규모 (추정치, 주7-2)였고, 수군(水軍) 또한 그 규모가 2만여 명 규모 (추정치, 주7-2)였다는 점을 파악한 제갈량은, 이를 바탕으로 조조의 적벽 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을 설계했습니다.
먼저 제갈량은 당시 유비(劉備)가 가진 병력과 주유가 지휘하는 양주의 육상 병력을 통해 적벽 강안에 배치된 조조의 육상 방어선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중원과 달리, 산림이 많았던 적벽의 강안지역은 대규모 병력 기동, 특히 기병의 움직임을 제한했으며, 이에 따라 규모와 속도라는 조조군의 강점들이 희석될 수 있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제갈량과 주유는 목조함선을 기반으로 구축된 조조의 수상방어선을 붕괴시키기 위한 화공(火攻), 그리고 방어선의 붕괴 이후 조조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한 침투작전을 준비했습니다. 지상에 구축된 요새와 방어선의 경우, 1차 방어선이 붕괴된다면, 추가병력 투입을 통해 2차, 3차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적의 공세를 순차적으로 저지할 수 있지만, 당시 조조의 수군 규모로는 이러한 체계를 수상방어선에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이에 제갈량과 주유는 적벽 방어선의 일부가 붕괴될 경우, 주유가 지휘하는 양주의 수군이 빠르게 돌파하여 조조의 후방을 교란함으로써 방어선을 붕괴시키고자 했습니다.
초기 규모의 열세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유비와 손권, 제갈량과 주유는 이제 조조의 적벽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 남서부에 대한 정치적 통합으로 제국 시스템 재건을 완료하고자 했던 조조의 계획까지 좌절시킬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208년 12월 초, 제갈량과 주유는 조조의 적벽 방어선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습니다.
주유가 지휘하는 양주의 수군이 조조의 수상방어선에 화공을 개시하고, 유비가 지상에서 공세를 시작하면서, 적벽대전은 제갈량의 예상대로 전개되었습니다. 건조한 날이 계속되어 화재에 취약했던 목조함선들은 화공이 가해지자 빠르게 불타올랐고, 조조의 수상방어선은 순식간에 붕괴되었습니다. 적벽의 유속은 주유의 수군이 빠르게 조조군의 후방에 침투할 수 있도록 했고, 산림이 무성한 적벽의 강안 지역은 유비와 관우(關羽), 장비(張飛)가 소규모 게릴라전의 경험이 없었던 조조군의 육상 전력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습니다.
장강이라는 유동성 위에 목조함선으로 구축된 적벽의 수상방어선은 조조가 기대했던 지상방어선의 안정성과 견고함을 제공해주지 못했습니다. 더불어 장강 유역의 산림은 조조군의 핵심인 기동성을 제약함은 물론, 기병들의 전투력을 극도로 제한함으로써, 중원이라는 환경을 통해 극대화될 수 있었던 조조군의 강점을 모두 희석시켰습니다. 이렇게 조조가 처했던 구조적 여건들을 활용한 제갈량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조의 형주 통합 계획을 지키기 위해 구축된 적벽 방어선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적벽 방어선의 붕괴로 인해, 조조의 계획은 다시 한 번 수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장강 이북의 형주 북부 지역에 대한 확보 대신, 조조는 이미 확보한 양양 및 남양군, 전략적 요충지인 강릉 등을 포함한 형주 북부의 주요 거점도시에 대한 방어에 집중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주7-3). 종친인 조인(曹仁) 양양과 인근 번성(樊城)의 방어의 책임을 맡긴 조조는 곧 허도(許都)로 귀환했으며, 비록 적벽대전에서는 패배했지만, 제국 시스템 재건과 운영에 중요한 기능을 제공할 수 있는 형주 북부를 확보한 이상, 이후 형주에 대해서는 어떠한 군사적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적벽 방어선이 붕괴된 이후, 유비는 병력을 빠르게 이동시켜 새로 행정구역이 설치된 장강 이남, 형주 남부의 4군(郡)인 장사(長沙), 계양(桂陽), 무릉(武陵), 영릉(零陵)을 확보했습니다. 이를 통해 유비는 자신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영역, 즉 하드웨어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남부의 4군은 개발이 미진한 지역이었기에, 유비는 서둘러 대안을 찾아야 했습니다.
한편 형주 북부로 가는 교두보였던 강릉(江陵)에서는 조인과 주유가 1년여에 걸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손권과 주유는 적벽 방어선을 붕괴시킨 여세를 몰아 형주의 핵심 북부를 확보하고자 했고, 이로 인해 발생한 남부의 공백은 유비가 남부 4군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한 셈 입니다. 결국, 1년에 걸친 강릉 공방전은 주유의 승리로 끝나지만, 형주의 핵심인 양양 및 남양군(南陽郡)은 여전히 조조가 이끄는 중앙정부의 통제권 아래에 있었습니다 (주7-4).
결국, 적벽대전에서는 승리했지만 미개발지역인 남부만을 확보한 유비와 큰 비용을 치른 뒤 강릉만을 확보할 수 있었던 손권 사이에는 향후 형주의 패권을 사이에 둔 미묘한 긴장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주7-2.
양양 입성 당시 조조의 총병력은 사료상 15만 명에 달했으나,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紀)에 기록된 역병 피해, 그리고 형주 북부의 거점 방어를 위해 투입된 병력 규모를 고려하면 당시 적벽에 투입된 병력규모는 약 3만 명으로 추산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선주전(先主傳)에 기록된 유기의 수군 1만 명 이탈은 조조의 수군 전력에 치명적인 공백을 발생시켰으며, 결국 적벽에서 유비와 손권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주7-3.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紀)와 조인전(曹仁傳)에 따르면, 조조는 적벽에서의 패배 직후 전면적인 퇴각 대신 조인(曹仁)과 악진(樂進) 등 핵심 장수들에게 양양과 강릉 방어임무를 맡기며 형주 북부의 하드웨어를 최대한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주7-4.
삼국지(三國志) 주유전(周瑜傳)에 따르면, 주유는 조인(曹仁)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강릉을 점령하는 데 1년의 시간을 소모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기간은 조조에게는 형주 북부의 방어선을 정비할 기회가 되었으며, 유비에게는 형주 남부 4군을 장악하여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마련할 공간을 제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