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로 읽는 삼국지(三國志) | 제3장 군벌 (2)
기주(冀州)로 돌아온 원소(袁紹)는 자신이 맹주로 나섰던 반동탁제후연합군의 패배를 뒤로하고 명문가 출신의 젊은 지도자로서 손상된 자존심과 명망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후한(後漢) 제국의 시스템은 더 이상 귀족 중심 운영체제를 지탱할 수 없는 수준으로 무너진 상태였기에, 이후 원소는 장안(長安) 조정(朝廷)은 물론 헌제(獻帝)에게도 큰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원소에게 있어 귀족 중심의 체제는 자신의 사회적·정치적 위치와 권위를 제공하는 플랫폼이었습니다. 따라서, 체제가 유지된다면, 그 체제가 가동되는 시스템이 어떤 시스템인지 여부는 그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동탁제후연합군이 실패로 끝난 191년 말, 원소는 당시 황실 종친이자 유주목(幽州牧)이었던 유우(劉虞)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이는 동탁(董卓)이 장악한 장안 조정을 부정하고, 후한 제국의 시스템과의 호환성을 유지하면서, 귀족 중심 운영체제를 복구하자 했던 원소만의 '시스템 리셋' 시도였습니다. 이는 또한 황제라는, 시스템의 핵심을 공략함으로써 빠르게 명분과 권력, 즉 시스템 관리자 권환을 확보했던 동탁의 방식을 모방한 정치적 시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전 운영체제, 즉 귀족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던 원소. 그는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고 새로운 조정을 새우는 일에 조조(曹操)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운영체제를 통해 제국 시스템을 재건하고자 했던 조조는 원소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계획의 핵심 인물인 유우 역시 그의 제안을 거절하자, 결국 원소는 후한 제국 시스템과의 호환성을 유지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주3-2).
192년경, 원소는 북방의 공손찬(公孫瓚)과 연합하여 당시 기주목(冀州牧)이었던 한복(韓馥)을 압박해 물러나게 함으로써 기주를 중심으로 하드웨어, 즉 귀족 체제를 위한 시스템의 기반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약 1년 뒤, 자신이 황제로 추대하려 했던 유우가 공손찬과의 대립 끝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를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소는 유우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유우의 죽음을 역내 라이벌인 공손찬과의 군사적 긴장조성을 위한 구실로 삼았을 뿐입니다.
앞서 1장을 통해, 중원 지역은 남서부와 달리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제가 이루어져, 지역 호족들이 사병(私兵)등을 기반으로 한 독자 세력을 형성하기 어려운 구조였음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중원의 이러한 구조적 특징은 원소가 하북(河北) 지역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습니다. 한복을 물러나게 한 뒤, 곧 기주 전체를 확보한 원소는 동쪽의 청주(靑州)를 향해 공세를 펼침으로써, 하북 지역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4년, 원소는 유주(幽州)를 근거지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공손찬과 하북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게 됩니다.
199년, 장기간의 대립 끝에 원소는 마침내 역경(易京)에서 공손찬을 제압하고 유주를 세력권에 편입하며 하북의 독보적인 강자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예전 제국 운영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조조가 이끄는 허도(許都)의 조정에서는 이런 원소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도 있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했으나 서영(徐榮)과의 전투에서 뼈아픈 패배를 맛본 조조는 근거지인 진류(陳留)로 돌아와 전열을 가다듬고 병력을 재건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그는 연주(兗州)와 예주(豫州)로 세력을 확장하며 자신이 품고 있던 제국 운영체제에 대한 비전을 본격적으로 실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조는 우선 붕괴된 농업 생산 기반을 복구하고 유민들을 정착시켜 사회를 안정시킴으로써, 제국을 지탱할 견고한 '시스템' 재건의 청사진을 준비했습니다.
동시에 가문이나 배경보다, 오직 능력만을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파격적인 인사정책기조를 통해, 운영체제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역량을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조조는 이를 통해 순욱(荀彧), 순유(荀攸), 정욱(程昱) 등을 등용했으며, 이후에는 가후(賈詡) 같은 인물까지 수용하며 인재풀을 비약적으로 확장했습니다. 또한 전위(典韋), 허저(許褚), 서황(徐晃), 장료(張遼) 등 무관들 역시 출신과 배경을 불문하고 실력을 바탕으로 중용했습니다.
또한 조조는 황건적(黃巾賊) 잔당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투항한 병력을 흡수해 직속 부대인 '청주병(靑州兵)'을 창설했습니다. 여기에 정예 기병 부대인 '호표기(虎豹騎)'를 운용함으로써 자신이 설계한 운영체제의 확장에 필수적인 군사적 역량 또한 축적했습니다.
이를 통해 조조는, 견고한 운영체제(경제·사회 기반)와 이를 가동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소프트웨어(인재 체계), 그리고 운영체제의 확장을 위한 강력한 군사력이라는 세 가지 축을 바탕으로, 당시 중원의 어떤 군벌이나 제후보다 빠르게 제국 시스템의 재건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핵심 역량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6년 초, 장안을 탈출한 헌제가 폐허가 된 낙양(洛陽)에서 어렵게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 조조에게 전해집니다.
당시 조조의 참모 순욱은 헌제를 영접하는 것이 "천하의 대의를 얻는 길(奉天子以從衆望)"이라고 조언했고, 이에 조조는 즉시 낙양으로 이동해 황제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수도 기능을 상실한 낙양(洛陽)을 대신해 중원의 중심에 위치한 허현(許縣)을 새로운 제국의 수도, 즉 '허도(許都)'로 정하고 천도를 단행합니다.
당시 유비(劉備)는 서주(徐州)에서 주목 승계 이후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으며, 양주(揚州)의 손책(孫策)은 가문 세력의 재건에 여념이 없어 황제를 영접할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원소는 중원 북부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유표(劉表)와 유장(劉璋) 또한 각각 형주(荊州)와 익주(益州)에서 안정을 구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조조와 달리 낙양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미 무너진 제국 시스템의 상징이며, 유명무실해진 황제를 모심으로써 실익이 없는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이를 통해 예전 제국 운영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기다리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원소의 참모 저수(沮授)는 순욱과 마찬가지로 황제를 모실 것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원소는 황제를 모시는 것이 자신에게 실익이 없고, 오히려 유명무실해진 황제의 존재는 자신을 번거롭게 할 뿐이라며, 저수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유표와 유장 또한 자신들만의 준(準)독립 정권을 유지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기에, 황제에 대해서는 수동적인 태도에 머물렀습니다.
결국 낙양의 폐허 속에 남겨진 유명무실해진 황제를 영접하기 위해 움직인 인물은 조조뿐이었습니다.
제국이라는 시스템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운영체제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조조는, 황제를 영접함으로써 제국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제국 운영체제의 혁신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비전에 명분과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조조는 이어서 제국 시스템 재건의 거점으로서 허도에 새로운 조정을 세웠습니다. 동탁이 장안 천도를 통해 자신이 중심이 된 운영체제의 보존, 즉 '폐쇄성'을 추구했다면, 조조는 허도 천도를 통해 자신이 설계한 새로운 운영체제의 '확장성'을 추구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조조는 허도 조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운영체제를 통해 제국 시스템을 재건하고자 했기에, 시스템을 교체하더라도 예전 귀족 체제를 유지하고 한 군벌들과의 충돌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새로운 운영체제를 통해 제국 시스템을 재건하고자 한 조조.
예전 운영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한 원소.
제국의 핵심, 중원의 패권이 걸린 관도대전(官渡大戰)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주3-2.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紀) 및 원소전(袁紹傳)에 따르면, 191년 원소는 한복과 모의하여 유주목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습니다. 당시 원소는 조조에게 "장안의 황제(헌제)는 동탁의 괴뢰에 불과하니, 명망 있는 유우를 세워 조정을 재건하자"고 제안했으나, 조조는 "나는 서쪽(헌제)을 받들 것"이라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