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는 왜
서주를 잃었을까?

구조로 읽는 삼국지(三國志) | 제3장 군벌 (1)

by 이현민

장안에 갇힌 역동성



원소(袁紹)를 맹주로 한 반동탁제후연합군이 낙양(洛陽) 인근에 집결하자, 동탁(董卓)은 물리적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 191년 초, 장안(長安) 천도를 단행합니다. 장안은 전한(前漢) 제국의 수도로서 도시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천혜의 요새인 함곡관(函谷關)과 동관(潼關)을 통해 방어하기에도 매우 용이했습니다.


그러나 산악지역에 위치해 접근이 어렵고 제국의 경제적 기반인 중원(中原) 지역과 거리가 멀어, 제국 운영체제를 확장시키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기에, 후한 제국은 수립 당시 중원과 인접한 낙양을 수도로 정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동탁에게는 이러한 장안의 폐쇄성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자신이 새로 구축한 운영체제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선택은 역설적으로 그의 운영체제가 내부로부터 붕괴하게 되는 구조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지도 4. 동탁(董卓)의 이동경로


앞서 동탁이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낙양으로 이끌고 온 서량군(西涼軍) 출신들을 중용하며 군 조직을 개편했음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동탁이 자신을 중심으로 한 제국 운영체제를 수립할 당시, 군부의 주요 구성원들 또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고 그에 따른 물질적 보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탁이 현상 유지를 위해 선택한 장안이라는 '방어중심의 하드웨어'는 조직 내의 역동성과 확장성을 완전히 제거해 버렸습니다.


견고한 방어선 안에서 군부 구성원들의 신분 상승 기회는 소멸되었고, 보상 체계 또한 작동을 멈췄습니다. 외부와의 교류나 확장이 차단된 폐쇄된 조직은 내부의 무질서가 증가한다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급기야 192년 4월, 동탁이 여포(呂布)에게 살해당하자 누적된 내부 긴장이 결국 폭발하기에 이릅니다.


군부 내 이각(李傕)과 곽사(郭汜) 파벌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하자, 동탁이 세운 장안 정권은 붕괴되기 시작했고, 조정(朝廷)은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196년 1월, 이들로부터의 위협이 극에 달하자 헌제(獻帝)는 폐허가 된 낙양으로 탈출했고, 그해 8월 조조(曹操)의 영접을 받아 새로운 수도 허창(許昌)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동탁은 군부와 정치적 명분 등 권력 장악을 위한 핵심 요소들을 빠르게 손에 넣으며, 제국의 운영체제를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권력을 공고히 유지하고 관리해 나갈 '소프트웨어', 즉 운영 철학과 역량의 부재는 그가 장악한 운영체제가 결국 내부에서부터 스스로 붕괴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외부 위협에 대한 대응에만 함몰되어 단행한 장안 천도는 동탁 체제의 핵심이었던 군부의 역동성을 억제했으며, 세력의 확장성 상실은 파멸로 귀결되었습니다.



시스템과 운영체제의 붕괴



한편 동탁이 장안 천도를 단행한 직후, 목표를 상실한 반동탁제후연합군의 구성원들은 두 가지 선택지 앞에 놓였습니다. 장안으로 진격해 황제를 구출할 것인가, 아니면 불타버린 낙양을 뒤로하고 각자의 본거지로 복귀할 것인가였습니다.


황건의 난 이후 불안정해진 제국의 시스템에 이어, 운영체제마저 붕괴 수순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한 대부분의 제후들에게 무리한 장안 공습은 실익이 없었습니다.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황제를 구출하기보다, 다가올 난세, 시스템 변혁의 시기에 대비해 자신의 세력을 보존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연합군은 해체되었고 제후들은 각자의 본거지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 유일하게 동탁을 추격하며 불타는 낙양에 입성한 손견(孫堅)은 황궁의 우물에서 제국 시스템과 운영체제의 상징인 전국새(傳國璽)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곧 제국의 시스템과 운영체제가 모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황에서, 그 상징성마저도 상실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이후 제후들의 움직임은 제국의 운명에 대한 각자의 관점에 따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유비: 서주로 떠나다



유비(劉備) 또한 반동탁제후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했지만, 그는 자신이 기대했던 정치적 기회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193년 경, 유비는 자신과 동문수학했던 선배이자, 당시 유력 군벌 중 하나였던 공손찬(公孫瓚)의 휘하에 머물게 됩니다. 북방의 3개주 중 하나인 유주(幽州)를 기반으로, 접경지역의 강한 군사력을 보유했던 공손찬이었지만, 정치적 비전이 결여된 군벌에 가까웠던 그는 유비가 원하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없었습니다.


194년 초에 이르러, 공손찬이 원소와의 군사적 대립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유비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르게 됩니다. 조조의 공세를 받게 된 서주(徐州)의 도겸(陶謙)이 공손찬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유비는 이를 기회로 공손찬에게 병력을 빌려 서주로 떠납니다. 이때 보여준 유비의 선택은, 기반은 부족하지만 확고한 목적을 가진 정치인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을 보여줍니다.


유비(劉備)의 이동경로



유비: 서주를 얻다



당시 서주는 사회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지역이었으나, 서주목 도겸은 이미 60세가 넘은 고령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비는 서주가 조만간 승계가 발생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임을 간파하고, 그 과정에 참여하고자 도겸의 요청을 수락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는 훗날 그가 60세의 유표(劉表)가 재직하던 형주(荊州)로 향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선택입니다. 인적 자원, 즉 소프트웨어 외에는 어떠한 기반도 없었던 유비가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담은 운영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기반을 가진 권력의 세대교체 과정에 진입하여 하드웨어와 시스템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현실적인 선택지였습니다.


서주에 입성한 유비는 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빠르게 얻어낼 수 있었고, 도겸 사후 마침내 서주목의 자리를 승계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비의 서주 통치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서주라는 시스템을 ‘승계’받는 것과 그 운영체제를‘장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유비는 서주목의 지위를 통해 시스템은 얻을 수 있었지만, 서주의 운영체제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습니다. 외부 인사였던 유비의 운영체제는 지역세력 중심의 소프트웨어를 통해 작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행정부의 경우, 자신의 승계를 지지했던 지역 호족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군부의 상황은 사뭇 달랐습니다.


유비가 승계할 당시 서주의 군 지휘권은 조표(曹豹)가 쥐고 있었습니다. 조표는 유비가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를 중심으로 군부를 재편할 경우, 자신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지위마저 상실할까 우려했으며, 이는 당시 유비가 조표와 같은 주요 군부 인사들을 설득하고 조기에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음을 의미합니다 (주3-1). 군부를 시작으로 제국의 운영체제를 빠르게 장악했던 동탁의 사례와 비교한다면, 이는 유비의 뼈아픈 실책이었습니다.


서주의 불안정한 상황을 지켜보던 예주(豫州)의 원술(袁術)이 북진하자, 유비 역시 병력을 이끌고 접경 지역으로 나아갔습니다. 서주 내부가 불안정했기에, 당시 원술은 유비의 대응 능력을 과소평가했지만, 처음으로 '주(州)' 규모의 하드웨어를 확보한 유비 역시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국 양측은 한 달여의 대치를 이어가게 되지만, 바로 그 순간, 유비가 미처 통제하지 못한 서주 운영체제의 균열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유비: 서주를 잃다



장비와 깊은 갈등을 겪고 있던 조표가 당시 유비에게 의탁하고 있던 여포(呂布)를 설득하여, 방어 체계가 허술해진 서주의 중심지 하비(下邳)를 급습하게 한 것입니다.


당시 여포의 병력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조표가 지휘하던 서주군의 핵심인 단양군(丹陽軍)은 별다른 저항 없이 성문을 열고 하비를 내어주었습니다. 도겸과 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통해 서주라는 하드웨어를 승계받는 데는 성공했지만, 군부라는, 운영체제의 핵심 기능의 장악에 실패한 유비는 결국 196년 6월경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기며 첫 근거지를 상실하게 됩니다.


결국 유비는 같은 해 말, 당시 헌제를 모시고 허도로 천도한 조조에게 의탁하게 됩니다. 그리고 허도에서 유비는 자신의 정치적 명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예상치 못한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서주에서의 패배를 통해, 유비는 '명분과 비전'을 자산으로 삼는 리더가 어떻게 실질적인 기반을 확보해야 하는지 깨달은 듯 보입니다. 그리고 유비의 이후 행보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합니다.




주3-1.

삼국지(三國志) 선주전(先主傳)에 의하면 당시 유비의 서주목 승계는 서주의 핵심 문관 및 호족 세력인 미축(糜竺)과 진등(陳登)의 강력한 지지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서주 군부의 주력이었던 단양군(丹楊兵)은 유비의 운영체제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단양군을 지휘하던 조표가 장비와 충돌하자, 이들은 여포와 내통하여 근거지인 하비를 내어주게 됩니다. 이는 유비가 서주 운영체제의 핵심인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시스템에 대한 막연한 신뢰만을 가지고 원술과의 전면전에 나서야 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