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로 읽는 삼국지(三國志) | 제2장 동탁 (2)
개인 권력에 집착한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에서 제국 조정을 좌우하는 동안, 발해(渤海)와 진류(陳留)에서는 원소(袁紹)와 조조(曹操)가 세력을 키우며, 낙양과 동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진단하는 관점에 있어서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원소(袁紹)
사세오공(四世五公), 즉 4세대에 걸쳐 5명의 삼공(三公)을 배출한 원소의 집안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였고, 이런 배경을 가진 원소는 당시 낙양(洛陽) 조정(朝廷)에서도 주목받는 젊은 장교였습니다. 이러한 원소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의 가문과 사회적 위치가 정의되는, 귀족 중심의 제국 운영체제 였습니다.
낙양(洛陽)에 머물던 시절, 하진(何進)의 신임을 받았던 원소는 정치적인 포부를 가졌다기보다 자신과 가문의 명성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동시에, 황제 곁에서 국정을 농단하며 제국 운영체제를 농락하는, 자신과 같은 근본을 갖지 못한 환관세력에 대해서는 뿌리 깊은 혐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탁이 낙양에 입성할 당시, 원소는 큰 반발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동탁 또한 원소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습니다. 동탁이 소제(少帝)를 폐위하고 헌제(獻帝)를 옹립하는 등 제국 운영체제의 근간을 위협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원소 가문과 같은 중앙 귀족들의 정치적 위치를 인정했더라면, 원소는 동탁을 향해 창끝을 겨누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탁이 황제를 폐위하고 상국(相國)의 자리에 올라 삼공(三公)을 기반으로 한 제국 운영체제를 손상시키면서 기존 운영체제의 핵심이었던 귀족들의 입지와 명성이 위협받게 되자, 원소는 동탁을 향한 공세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조조(曹操)
환관의 양자 집안 출신인 조조는 오직 자신의 실력으로 낙양의 기도위(騎都尉), 즉 수도의 기마부대를 통솔하는 장교의 위치에 오른 인물입니다. 환관 가문에 대한 사회적 멸시와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서 조조는 누구보다 자신의 능력을 통한 인정받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조조는 이것을 제국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기보다 운영체제의 문제로 인식했습니다. 즉, 제국의 시스템은 유지하되, 그 운영체제를 혁신하고자 했던 것이 조조가 가진 정치적 비전이었습니다.
황건(黃巾)의 난 이후, 진류(陳留)에서 가산(家産)을 기반으로 거병한 조조는 자신의 종친들은 물론 지역의 유능한 인재들을 중용하며 내실을 쌓았습니다. 동시에 지역 유력 가문들의 지원을 받아 기반을 확충해 나가며,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실현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동탁의 전횡이 점차 심각해지면서, 전국적인 인망을 가진 가문의 후계자이자 발해에 거점을 마련한 원소를 향해 동탁 축출에 앞장설 것을 요구하는 압력은 점차 거세졌습니다. 189년 겨울, 동군(東郡) 태수 교모(橋瑁)에 의해 삼공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격문이 전국에 퍼지게 되자, 원소는 제후들의 추대로 맹주(盟主) 자리에 올라 동탁에 대한 군사 행동을 개시합니다.
이에 약 13명의 제후가 동참하며, 원소를 중심으로 결성된 반동탁제후연합군(反董卓諸侯聯合軍)은 190년 정월, 낙양 인근 산조(酸棗)와 하내(河內) 지역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집결한 각 제후의 병력을 합산하면 제후연합군의 규모는 약 10만 명 규모로 추정됩니다. 낙양에 있던 동탁의 병력이 약 5만 명 규모로 추정됨을 고려한다면, 당시 제후연합군의 규모는 동탁을 압도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주2-1).
하지만 반동탁제후연합군은 동탁을 축출하지도, 낙양을 수복하지도, 황제의 보위를 지켜내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제후연합군의 실패는, 정치적 실익계산에 기반한 연합 세력의 한계와 당시 군사 전략의 취약성을 동시에 노출한 사건이었습니다.
원소를 맹주로 추대하여, 동탁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제국 운영체제의 질서를 회복시키려 했지만, 제후연합군에게는 이러한 명분을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 계획이 없었습니다. 각 제후가 자신의 병력을 거느리고 낙양 인근 여러 곳에 산개하여 주둔한 사실은 이 조직이 군사동맹이라기보다 정치결사에 가깝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2-2).
제후연합군의 복잡한 구성을 고려했을 때, 동탁의 축출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통일된 지휘 체계는 물론, 효율적인 병참체계는 필수 요소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휘권과 병력을 잃을까 우려한 제후들은 일부러 각기 다른 곳에 주둔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각 제후들은 본거지로의 귀환이 용이한 지역에 주둔했는데, 이는 병력 규모를 통한 심리적 압박 효과는 물론, 실제 동탁에게 군사적 타격을 줄 수 있는 병력 기동의 기회를 심각하게 제한했습니다.
병참 또한 각 제후가 자체적으로 관리했습니다. 병참관리를 맹주 또는 특정 제후에게 위임할 경우, 자신의 병력에 대해 불평등한 보급이 발생하거나, 다른 제후들에게 자신들의 군수물자를 빼앗길 것을 우려한 제후들이 군 지휘권에 이어 병참의 일원화 또한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는 제후연합군 구성원간 병참 환경의 차이를 낳았고, 점차 전력 불균형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주2-3).
예를 들어, 낙양 인근에 기반한 원술(袁術)은 병참에 문제가 없었으나, 강동(江東)에서 북상한 손견(孫堅)은 병참선이 길어지면서 보급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손견은 원술에게 병참지원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유사한 갈등들이 반복되며 제후 간의 결속력은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착 상태를 해소하고자 했던 조조는, 원소의 주력군이 황하(黃河)를 건너 하양(河陽)에서 압박하고, 조조 등이 이끄는 별동대가 동탁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동탁을 압박하는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동탁이 이끄는 서량군의 전투력에 대한 공포, 그리고 전공이 조조에게 집중될 것을 시기한 제후들의 반대로 이 제안은 거부되었습니다.
결국 조조는 자신만의 병력를 이끌고 독자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지만, 형양(滎陽)에서 동탁군의 서영(徐榮)에게 크게 패배했습니다. 사촌 조홍(曹洪)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조조는 제국 시스템 질서의 중추인 귀족과 제후들의 무능에 환멸을 느끼며 진류(陳留)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대규모 전역(戰域) 수준의 군사적 충돌 양상을 고려한다면, 제후연합군의 의도 자체는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대규모 전역들은 직접적인 물리적 충돌보다, 압도적인 규모로 상대의 기세를 꺾어 교전 없이 승패를 결정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주2-4).
제후연합군의 병력 규모 및 결성 이후 움직임을 볼 때, 당시 제후연합군 또한 동탁과의 결전을 추구하기보다 규모를 이용한 압박으로 정치적 협상을 이끌어 내고자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제후연합군 결성이 알려지고, 낙양 주변으로 병력이 집결하기 시작하자 동탁이 빠르게 장안(長安) 천도를 결정했다는 점에서, 제후연합군의 초기 압박 전략 자체는 어느 정도 유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동탁이 장안 천도와 낙양 소각이라는, 당시 전쟁의 문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비대칭적 방식으로 대응하자 제후연합군은 방향성을 잃게 됩니다. 이러한 내부 혼란 속에 제후 간의 신뢰까지 무너지면서, 결국 제후연합군은 190년 9월경 지지부진하게 해산했습니다.
귀족 중심의 제국 운영체제를 다시 복구하고자 했던 원소는, 자신의 명성과 정치적 명분을 바탕으로 반동탁제후연합군 결성을 주도했습니다. 결성 초기, 원소는 귀족들과 제후들의 지지를 얻으며 대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지만, 결국 제후연합군은 귀족 중심 운영체제가 가진 한계들을 극복할 수 없었고, 급기야 동탁이 장안 천도를 단행면서, 원소의 세력은 와해됩니다. 장안 천도를 제국 시스템 붕괴의 신호로 판단한 원소는, 귀족 중심 운영체제의 생존을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제후연합군의 시스템을 통해 제국의 운영체제를 복구하고자 했던 조조는, 오히려 제후연합군을 통해 기존 귀족 중심 운영체제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운영체제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귀족 중심 운영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했던 세력들과, 제국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운영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던 세력간의 필연적인 격돌은 중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2-1.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記)에 따르면, 각지에서 일어난 제후들이 산조에 집결했을 때 그 군세가 수만 명에 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원소와 한복이 하내에서 동원한 병력까지 합산하면 전체 연합군의 규모는 약 10만 명 내외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한편, 후한서(後漢書) 동탁열전(董卓列傳) 및 삼국지 동탁전(董卓傳)과 여포전(呂布傳)에 의하면, 동탁은 초기 약 3,000명 규모의 병력으로 시작했으나 하진의 중앙군과 정원의 병주 기병을 흡수하며 세력을 수만 명 규모로 확대했습니다. 다만, 당시 사례교위부를 비롯한 낙양 일대의 기근으로 인해 대규모 상비군 유지가 어려웠던 점을 고려하면, 당시 동탁군의 실질 규모는 약 5만 명 내외로 추산됩니다.
주2-2.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記)에 따르면 원소와 한복은 하내 (낙양 동북쪽), 조조와 장막은 산조 (낙양 동쪽), 원술은 남양(南陽) 일대 (낙양 남서쪽)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각 지역들은 직선거리로 평균 약 200 km가량 떨어져 있었고, 당시 보병의 하루 이동거리가 약 20km로 추정됨을 고려하면, 당시 병력의 전개상황은 통신은 물론 상호지원도 어려운 수준으로 제후연합군이라는 명칭이 무색할 수준이었습니다. 후한서 유대전(劉岱傳), 삼국지 장막전(張邈傳)에는 당시 집결한 제후들이 동탁과의 결전을 준비하기보다, 서로간의 정치적 견제에 더 집중했던 상황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주2-3.
삼국지(三國志) 손견전(孫堅傳)과 원소전(袁紹傳)에는 제후들이 상호 견제를 목적으로 병참을 무기화했던 정황이 상세히 나타납니다. 또한 무제기(武帝記)에 의하면, 통일된 보급 체계의 부재와 각 세력 간의 불균등한 병참 환경은 군사적 실효성을 상실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제후 연합전선이 내부적으로 붕괴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주2-4.
당시의 군사적 관점에서 압도적인 군세의 과시는 정치적 정당성을 기반으로 한 명분과 함께, 직접적인 교전 없이 적의 투항이나 와해를 이끌어내는 '부전이굴인지병(不戰而屈人之兵)'의 핵심 전략이었습니다. 소수의 병력을 대군으로 위장해 낙양 조정을 장악했던 동탁, 관도에 압도적 병력을 집결시켜 조조를 압박하고자 했던 원소, 그리고 남서부 지역에 대한 정치적 편입을 목적으로 중원의 대병력을 동원했던 조조의 사례는 당시 대규모 전역에서 물리적 타격력만큼이나 전략적 위압을 중시했던 전쟁 양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