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은 어떻게
후한 조정을 장악했을까?

구조로 읽는 삼국지(三國志) | 제2장 동탁 (1)

by 이현민

환관과 외척, 그리고 동탁



황건(黃巾)의 난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이후인 189년, 영제(靈帝)가 세상을 떠나고 소제(少帝, 유변 劉辯)가 즉위합니다. 영제는 중앙정부의 실권을 쥔 환관(宦官) 세력과 외척 하씨(何氏) 가문 사이의 정치적 긴장을 비교적 잘 관리한 편이었지만, 그가 서거하자 이러한 긴장은 점차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리고 소제가 즉위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89년 늦여름, 외척 세력의 수장인 대장군 하진(何進)은 십상시(十常侍)로 대표되는 환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앞서 1장에서 후한(後漢) 제국 병력의 상당수가 북방 3개 주(州)를 중심으로 한 접경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하진은 이 북방의 병력을 낙양(洛陽)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했고, 이에 동북 병주(并州)의 정원(丁原)과 서북 양주(涼州)의 동탁(董卓)이 접경 지역의 병력을 이끌고 낙양으로 출발합니다.


제국 서북의 양주 방면에서 강족(羌) 등 변방 세력을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동탁은, 수도의 혼란이 자신에게 가져다 줄 정치적 기회를 간파했습니다. 영제 재위 당시 발생한 황건의 난은 다행히 양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동탁은 당시의 혼란속에서 의미 있는 공적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런 동탁에게 하진의 소집은 다시는 놓치기 어려운 정치적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동탁의 낙양 입성



하진의 계획을 미리 파악한 환관들은 한발 앞서 움직였고, 결국 189년 9월 22일 하진과 그 일파를 제거하는 데 성공합니다. 십상시를 중심으로 한 환관 세력은, 외척의 수장 하진과 그 일당을 제거함으로써 권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을 없앴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환관들에 대한 반감이 폭발하게 된 뇌관이 된 것입니다.


하진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노식(盧植) 등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물론, 당시 낙양에 있던 원소(袁紹)와 원술(袁術) 등 하진 휘하의 젊은 장교들은 병력을 이끌고 궁궐로 진격하여 환관 세력을 빠르게 제거했고, 이 과정에서 낙양 조정은 유례없는 대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혼란의 직후, 동탁이 낙양에 도착합니다.


당시 동탁의 근거지였던 서량(西涼)은 낙양에서 약 700km가량 떨어져 있었으나, 진작부터 하진과 긴밀하게 소통하던 동탁은 이미 병력을 이동시켜 낙양 인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동탁이 낙양에 당도했을 때 조정은 이미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그는 오히려 더 큰 정치적 기회를 포착해 냈습니다. 궁궐에 들이닥친 군부를 피해 환관들과 함께 도주하던 소제와 진류왕(陳留王) 유협(劉協)이 낙양 인근 북망산(北邙山) 일대를 지나다 동탁군에 발견된 것입니다. 그리고 동탁은 황제와 진류왕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낙양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낙양에 입성한 동탁은 군부를 통제하며 하진이 지휘하던 병력을 흡수하는 동시에, 여포(呂布)를 매수하여 낙양 인근에 주둔하던 정원 또한 제거함으로써 수도의 군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승자가 전장을 정리하듯, 낙양 조정을 재편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동탁의 속도전



비록 중앙 정계에서의 경험은 전무했으나, 이후 동탁이 보여준 행보들은 기민한 정치적 계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동탁은 수도의 군권을 장악했습니다. 외척과 환관 세력의 충돌 당시, 수도에 배치된 병력에 대한 지휘체계는 구조적으로 분산된 상태였습니다. 이에 동탁은 자신이 양주에서 데려온 서량군(西涼軍)출신의 군관들을 중심으로 군부를 빠르게 재편함과 동시에, 잠재적으로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기존 지휘관들은 지휘체계에서 배제시켰습니다.


두 번째로, 그는 잔존한 정치 세력인 외척과 환관들을 조정에서 완전히 축출하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 동시에 구세력이 자신에게 정치적 위협이 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동탁의 움직임은 일반적인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정적들을 제거하는 수준을 넘어, 그들의 정치적 명분의 기반인 황제를 교체함으로써 기존 세력이 가졌던 명분 자체를 제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동시에 구 정치세력과의 연결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영제의 모친인 동태후(董太后)에 의해 양육된 진류왕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함으로써, 자신이 차지할 정치적 위치에 구조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동탁은 기존 낙양(洛陽) 조정(朝廷)의 시스템을 답습하는 대신, 새로운 권력 체계를 설계함으로써 권력 장악의 속도와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습니다. 189년 10월 소제를 폐위시키고 헌제(獻帝)를 옹립한 동탁은, 11월 스스로 상국(相國)의 자리에 오르는데, 이는 최고위 관직들이자 제국의 정치적 합의체인 삼공(三公: 태위 太尉, 사도 司徒, 사공 司空)의 위에 군림하는 지위로, 이를 통해 동탁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쥐고 국정을 장악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한 뒤, 이를 단기간에 강화하는 데는 성공한 동탁이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시스템 장악과 운영체제 장악의 차이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제국 운영체제의 핵심인 낙양 조정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오직 개인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만 몰두했던 동탁은 제국 운영체제에 발생한 문제를 수습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군부의 재편, 구 정치세력인 외척과 환관의 척결, 관료체계의 개편과 소제 폐위와 헌제 옹립 등, 동탁이 단행한 조치들은 당시 제국 운영체제가 가진 문제점들을 더욱 심화시킬 뿐 이었습니다.


주요 의사결정권자들이 혼란 속에 사라지고, 남은 관리들은 생존을 위해 동탁의 눈치만 살피는 상황에서, 동탁은 민생과 국정을 돌보기보다 자신이 구축한 정치적 지위와 권력을 보전하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외척과 환관의 충돌을 목도하며, 제국의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보전할 수 있는 건 오직 무력이라고 판단한 동탁은, 공포정치를 통해 반대 세력의 형성을 억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동탁의 강권 통치는 수도 낙양에서는 일시적인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낙양 밖에서 시작되는 거대한 반발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동탁이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황제와 귀족세력, 삼공 등 고위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제국 운영체제의 근간을 위협하자, 이에 반발한 원소는 하북의 발해(渤海)로, 조조는 거병의 터전이 될 진류(陳留)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연고와 인망을 바탕으로 세력을 규합하며, 서로 다른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동탁을 낙양에서 축출하기 위한 움직임에 돌입하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