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997년 겨울방학, 부모님은 맞벌이었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동생 덕분에 난 겨울방학 내내 집밖를 나갔던 날이 없었다. 이사온지 얼마 안된 도시에 친구는 없었고 컴퓨터도 흔치 않은 시절이었다. 집에 있는 영화나 비디오테이프를 둘러봤자 이미 여러 번 본 것들 이었고 당시 TV 프로그램 역시 재방송 일색이라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다.
새로운 것이라고는 당시 출판사에 다녔던 어머니 덕에 매주 배달되는 새로운 책과 아침마다 배달되는 신문뿐 이었다. 할 짓이 없었는지 책과 신문에 있는 텍스트를 다 읽고 나면 사진이나 그림을 뜯어 봤고 그마저 지루해 질 때 쯤에는 신문사, 출판사별 글씨체를 비교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나와 글씨꼴은 첫 만남을 가졌는데 내가 그 친구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었는지 그 이상으로 친하게 지내진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만났던 글씨꼴들과의 놀이는 우리 집이 맞벌이를 멈추고 내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면서 끝이 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고 나는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을 지냈고 2학년이 되었다. 그 사이 이름을 타이포그래피로 바꾸고 서양인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 옛 친구는 낯설고 어려워 한 번에 알아
보기 힘들었다. 워낙 영어와 친하지 않은 나는 타이포그래피라는 서양 이름을 달고 나타난 옛 친구를 알아보지 못하고 멀리지냈다.
결국 첫 타이포그래피 수업에서 옛 친구는 C+이라는 점수를 던져주며 10여 년 전의 벗에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함에 대한 서러움을 표출했다. 그 이후로도 한동안 오래 전의 친구가 그 친구였는지 알아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책이나 신문에서 만난 친구에 대한 감정이 나쁘지 않았던지 혹은 어린시절 구성된 사고의 범위가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는지 타이포그래피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름 책도 읽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나름이 타이포그래피 소모임까지 이어졌다. 사실 관심만 있던 상황이라 더 깊게 알아보고 싶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소모임이었다. 소모임장이 많이 아는 줄 알고 들어왔던 당시 소모임 사람들에게는 많이 미안했다. 그리고 많이 아는 척 하느라 힘들었다. 남모른 사정 속에 일 년 정도 소모임을 운영했다. "타이포그래피 정리"는 그 소모임에서 정리한 내용을 더 잊어버리기 전에 복습하려는
목적으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