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 1092호 사설.
중앙일보는 여전히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영향력 아래 있다. 중앙일보는 1996년까지만 해도 에버랜드의 지분 48.2%를 보유한 최대 주주였다. 에버랜드가 그해 11월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전환사채를 발행했는데 기존 주주들은 모두 포기했고 이재용 남매가 사들였다. 중앙일보 입장에서는 엄청난 손실을 감수한 셈이다. 에버랜드는 제일모직과 합병했다가 다시 삼성물산과 합병해 지금은 사실상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보다 한 달 앞서 중앙일보에서도 수상쩍은 거래가 있었다. 중앙일보가 전환사채를 발행했는데 최대주주였던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인수권을 포기했고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회장에게 넘어간다. 에버랜드의 최대주주는 중앙일보에서 이재용 남매로 바뀌고 중앙일보의 최대주주는 이건희에서 홍석현으로 바뀐다. 그리고 3년 뒤인 1999년 4월 중앙일보는 보광과 함께 삼성그룹 계열 분리를 선언한다.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출신의 김용철 변호사는 “홍석현 회장은 중앙일보 주식을 사들일 돈이 없었다”면서 “김인주 사장이 저에게 주식 명의신탁 계약서를 비밀리에 써달라고 해서 써준 일이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김 변호사는 “중앙일보 주주명의자는 홍석현 회장으로 하되 홍 회장은 의결권이 없으며, 이건희 회장이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으로 작성됐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의 주장이 맞다면 홍 회장은 이재용 남매의 편법 증여를 돕는 대신 자신의 지분을 늘리고 동시에 이건희 회장의 의결권을 보장해주는 이면 계약을 맺은 셈이다. 삼성 비자금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임광호 중앙일보 재무이사는 “홍 회장이 1998년 삼성그룹 비서실에서 141억 원을 받아 삼성 계열사들이 가진 중앙일보 지분을 인수하는 자금을 충당한 것이 맞냐”는 특별검사의 질문에 “그렇다”고 시인한 바 있다.
그렇다면 JTBC는 어떨까. JTBC는 홍석현이 100% 지분을 보유한 중앙미디어네트워크와 29.8%를 보유한 중앙일보가 각각 25%와 5%씩 보유하고 있다. 이건희·이재용 부자가 삼성물산과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수직적 지배구조를 구축했다면 홍석현은 중앙미디어네트워크와 제이콘텐트리를 중심으로 미디어 그룹을 확장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여전히 이건희의 것일 가능성이 크지만 JTBC는 홍석현의 소유라고 보는 게 맞다.
그런 홍석현이 손석희 앵커를 선택한 것은 철저하게 상업적인 판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홍석현은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신문 대신에 방송과 엔터테인먼트에 투자를 집중했고 삼성이 했던 정확히 그 방식으로 홍석현과 그 아들 홍정도의 보유 지분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그룹의 자원을 배분했다. 보수 성향의 중앙일보를 그대로 가져가되 JTBC는 색깔을 달리해 중앙일보의 한계를 극복하는 전략이었다.
태생적으로 자본 친화적일 수밖에 없는 JTBC와 신뢰도 1위의 언론인 손석희의 어색한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삼성과 중앙일보가 갈라섰다는 관측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중앙일보는 보수 기득권 집단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대변하고 있다. JTBC가 삼성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는 건 이건희·이재용 부자와 홍석현의 이해관계가 늘 일치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홍석현은 손석희가 필요했고 손석희이 홍석현에게 완벽한 편집권한을 요구했을 때 그걸 기꺼이 받아들였다.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는 아슬아슬한 약속이었지만.
손석희 앵커가 삼성을 비판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늘 초미의 관심사였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의 제보로 삼성의 노조 파괴 문건을 공개한 것도 JTBC였고 이건희 회장 성매매 동영상 역시 간단하게나마 JTBC에서 방송을 탔다. 최순실 게이트의 문을 연 것도 JTBC였지만 막상 이재용 부회장이 뉴스의 중심으로 떠올랐을 때 JTBC는 물러서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타협하는 순간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게 무너진다는 걸 손석희도 알고 홍석현도 알았을 것이다.
애초에 손석희가 돈이 된다는 판단에서 출발했겠지만 이제는 손석희 없는 JTBC를 상상할 수 없게 됐다. 여전히 이건희와 홍석현은 이해관계로 얽혀 있지만 홍석현 입장에서는 삼성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더라도 손석희를 살리는 게 맞다는 실리적인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판단은 상업적인 판단일 수도 있고 정치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다만 홍석현은 언제라도 손석희를 버릴 수 있고 손석희 역시 홍석현과 타협을 할 이유가 없다.
홍석현의 사퇴 선언 이후 대선에 출마하느냐 킹메이커로 나서느냐 해석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켜봤던 JTBC의 놀라운 보도가 홍석현의 선의나 호의가 아니라 손석희의 끊임없는 투쟁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홍석현이 뉴스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순간 손석희의 뉴스룸은 공정성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JTBC의 태생적 한계고 홍석현이 손석희를 영입했던 2013년부터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저널리즘의 본령은 권력을 감시하고 불의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데 있다. 저널리즘의 가치가 상업적인 성공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자본의 이해관계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겨우 허용된다. 그래서 저널리즘의 가치는 기자와 PD, 정의로운 언론인들의 부단한 투쟁을 통해 가까스로 지켜지는 것이다. KBS와 MBC가 하지 못한 일을 그동안 JTBC가 해 왔지만 손석희가 아니었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손석희 앵커가 21일 앵커 브리핑에서 밝혔듯이 그가 지켜왔던 원칙에서 한 발짝이라도 물러선다면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된다. 그런 상황이 되면 손석희는 타협하기 보다는 스스로 물러나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크다. 손석희의 투쟁을 격렬하게 응원하되 JTBC의 태생적 한계를 바로 보고 저널리즘 생태계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공영방송의 복원 역시 절실한 시대적 과제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손석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