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일>, 감독 대런 애런노프스키
영화 <더 웨일>은 2022년 개봉한 대런 애런노프스키의 영화로, 사무엘 D. 헌터의 동명의 연극 작품을 각색하여 제작되었다. 동성 애인을 만나 가족을 버리고 떠났지만 애인의 죽음 뒤 폭식으로 인해 초고도비만이 되었고, 이제는 심장병으로 인한 죽음을 앞두게 된 주인공 찰리는 브랜든 프레이저가 연기하였다. 그가 맡은 배역과 언뜻 겹쳐 보이기도 하는 삶의 질곡을 실제로 지나온 그는, 그 배경을 모르는 이에게까지 어필하는 순도 높은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그의 연기가 빛을 발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찰리의 비중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버스에서 내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는 인물(이 인물은 다음 장면에서 찰리의 집에 방문하는 선교사 토마스다.)을 높은 곳에서 잡는다. 그리고 대조적으로 화상강의 중인 노트북의 화면을 뒤이어 배치하는데, 그 조차도 격자로 나뉘어 있어 더욱 답답한 느낌을 준다. 심지어 주인공 찰리는 화면을 꺼 두어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오프닝이 시사하듯, 영화는 세상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된, 아주 가까운 사람 외에는 누구에게도 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는 찰리를 1.33:1의 좁은 화면에 가득 담아 밀착 서술한다. 그리고 이 장면 이후로 마지막까지 카메라는 찰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집을 떠나지 못한다.
찰리에게 울혈성 심부전 판정을 내린 리즈가 그의 남은 생을 일주일로 선고하면서 공간 뿐 아니라 시간 또한 제한된다. 화면 위로 떠오르는 요일 표시는 보고 있는 관객의 마음 역시 조여 간다. 원작이 연극인 점에서 시공간을 제한한 것은 일부 장르적인 선택이었을 것 같지만, 영화는 그 선택을 그대로 따르며 찰리의 내면과 그가 맺는 관계에 집중한다. 끊임없이 번갈아 그의 집을 찾아오는 (피자 배달부를 제외하면)네 명의 손님들은 찰리의 죽음에 대해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이는데, 그 반응이 나오기까지의 사연이 차차 밝혀지면서 사건 자체의 스펙타클 없이도 인물이 가지는 입체성이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끌고 나간다.
영화에서 제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관계는 찰리와 그의 딸 엘리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찰리는 절연하다시피 한 딸 엘리에게 연락을 하고, 폭력에 가까운 멸시와 비난을 감당하면서도 어떻게든 딸에게 다가가고 싶어한다. 그가 딸을 집으로 부른 이유는 점점 더 비뚤어지는 딸에 대한 걱정 때문이며, 나아가 그가 얼마나 훌륭하고 완벽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찰리의 조언처럼 나 역시 폼 잡지 않고 진실하게 써 보자면, 교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엘리와 같은 학생을 몇 번쯤 만난 적이 있다. 학생의 문제 행동에 대해 상담하기 위해 가정에 전화를 걸면, 물론 사과를 전하며 지도를 약속하는 보호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보호자는 찰리 같든지 찰리의 전부인 메리 같았다.
메리 같은 보호자는 자녀가 어릴 적부터 이미 너무 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켜서, 지도를 포기하고 완전히 지쳐있는 상태다. 메리는 엘리가 자신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사악하다'라고 표현하는데, 나 역시 실제로 자신의 딸에 대해 비슷하게 묘사하는 보호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래도 이 경우는 (마음은 아프지만) 자녀의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있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줄 안다는 점에서 대화가 가능했다.
대화가 불가능한 경우는 찰리 같은 보호자를 만났을 때였다. 최근 뉴스에서 보도된 바 '왕의 DNA'를 운운하며 아이의 심기를 거슬리는 그 어떤 말이나 행동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한 보호자처럼, 교정이 필요한 자녀의 말이나 행동은 외면하고 자녀에 대한 자신의 신념에 지극히 집착하는 경우다. 이런 보호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자녀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거나, 자신의 욕망을 자녀에게 투영한다. 그들은 '그런 애가 아닌' 자신의 자녀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를 기어이 찾아내며, 이를 통해 자녀의 문제 행동에 면책권을 준다. 자녀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그들의 방식이 잘못되었으며 다른 방향으로의 지도가 필요함을 설득하기란 매우 어렵다.
찰리는 엘리에게서 진실에 접근하는 에세이스트의 영혼을 발견하며, 비록 부성의 부재로 방황하는 중이나 그 깊은 곳엔 여전히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반짝임이 있음을 믿는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잘 한 일이 하나라도 있다는 걸 알아야겠어!"라는 외침에 이르면, 그런 찰리의 시선이야말로 진실을 외면하는 것으로 보인다. 찰리가 리즈에게 육체를 의탁하며 목숨을 이어온 것처럼, 이제는 엘리에게 정신을 의탁하여 죽음(구원)에 이르고 싶은 것 같다고 쓴다면 너무 냉정해 보일까? 어쩌면 진짜로 엘리의 내면에 빛나는 영혼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나, 엘리의 ‘4년 전’ 에세이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과 '넌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야'라는 고백은 찰리의 믿음이 엘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나 역시 모든 아이들의 가슴 속에 빛나는 영혼이 있음을 믿는다. 그러나 그 믿음만으로 아이의 삶의 문제까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히려 또 다른 진실에 대한 눈가림이며 기만이지 않을까. 영화는 전도를 통해 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토마스의 모습을 통해 종교적 구원의 길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비꼬는 것 같지만, 자신의 믿음에 심취하여 다른 사람의 진실을 자기 멋대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찰리도 다를 바 없다. 찰리의 죽음 뒤에 남겨진 엘리가 정말 자신의 가치를 발견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지 묻는다면, 다수의 경험에 비추어 짐작할 때 그럴 확률은 별로 높지 않다. 거기다 리즈와 메리의 삶까지 생각해본다면, 찰리가 찾은 구원의 길은 토마스의 것과 마찬가지로 다만 일인분의 구원이라는 씁쓸함을 지우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