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멘탈>, 감독 피터 손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피터 손 감독이 연출한 디즈니픽〮사의 신작 <엘리멘탈>은 원소들의 도시인 ‘엘리멘트 시티’에 살고 있는 불 원소 ‘앰버’와 물 원소 ‘웨이드’가 만나 서로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 이야기이다. 디즈니픽〮사의 대표작 <인사이드아웃>, <소울>의 제작진이 참여한데다 제 76회 칸 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많은 기대를 받으며 극장 개봉하였으며, 한국계 이민 2세인 피터 손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이 녹아 들어 한국 관객의 관심과 사랑을 더욱 끌어당기고 있다.
주인공 앰버와 그의 가족은 고향 ‘파이어랜드’를 떠나 ‘엘리멘트 시티’에 정착한 이민자 가족으로, 불의 원소 자치구역 ‘파이어타운’에서 편의점 ‘파이어 플레이스’를 운영하고 있다. 앰버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가게 운영을 도와오며 가게를 물려받을 꿈을 꾸고 있다. 그런 앰버의 앞에 우연한 사고로 물의 원소 웨이드가 나타나고, 앰버는 자신과 너무나 다른 웨이드를 만나면서 파이어타운 바깥 세계를 경험함과 동시에 내면적으로는 외면해왔던 자신의 진정한 욕구와 자아를 발견한다.
캐릭터나 이야기의 뼈대만으로 본다면 사실 <엘리멘탈>은 기발한 상상력과 전복으로 관객을 놀라게 해온 디즈니픽〮사의 전작들에 비해 상당히 평범하고 예상 가능하다. 특별한 외적 조건으로 소외 또는 결핍을 경험하지만 씩씩하게 살아가던 여성 주인공이 우연히 모든 면에서 풍족한 남성 주인공을 만나 사랑과 지원을 발판으로 자신을 찾고 한 단계 성장한다는 서사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며, 냉정하게 말하면, 약간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로맨스를 걷어내고 디아스포라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로 보았을 때도 감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엘리멘탈>의 인물들은 주인공 앰버와 웨이드를 포함하여 살아 있는 개인이기보다 특정 집단의 전형에 가까운 느낌이다. 앰버의 가족들이 받는 차별은 이미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흔히 묘사되었던 방식을 답습하는 정도이며, 개인의 고유한 경험이 아니라 대표성을 가진 사례 모음집 같다. 원소라는 물질의 특성을 인간의 성격이나 사회, 문화에 녹여낸 점은 신선했지만 반대로 그것이 이야기를 너무 명백한 우화로 만들어 인물을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그려내는 데 방해가 된 것 같기도 했다.
또한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꽃피우는 사랑, 개인의 자아와 욕구 실현, 이민자가 느끼는 소외와 차별,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 등 다양한 소재를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다 보니 ‘누수문제’라는 핵심 사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다소 산만하게 느껴졌다. ‘포식동물 실종사건’을 힘있게 끌고 나가며 처음부터 끝까지 ‘편견과 차별’에 집중하여 이야기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던 전작 <주토피아>가 2016년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쉽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엘리멘탈>이 환상적인 시각적 경험을 안겨주는 영화인 점은 확실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구현해내기 위한 디즈니픽〮사의 도전에는 한계가 없어 보인다. 높은 곳에서 내려본 엘리멘트 시티의 경관은 여태껏 디즈니픽〮사가 만들어온 어떤 세계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답다. 구름과 나무라는 구체물로 표현하기 쉬운 다른 두 원소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정된 형태가 없는 물과 불이라는 원소를 어색하지 않게 인간화한 상상력이나, 그 원소의 특징을 건축과 언어를 포함한 인간세계의 모든 곳에 녹여낸 재기발랄함 역시 인상깊다. 경기장에서 말 그대로 ‘파도타기’를 하는 장면이나, 웨이드가 몸을 부풀려 앰버의 빛을 하나로 모아 불을 붙이는 장면은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신선한 발상과 뛰어난 영상미에 빈약한 스토리텔링이 비교되며 오히려 더욱 안타까워지기도 했다.
<엘리멘탈>은 분명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다. 앰버와 웨이드가 처음으로 손을 맞대는 장면에서 가슴이 떨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용기를 내어 떠나는 앰버와 그를 기꺼이 보내며 축복하는 그의 부모를 보며 눈물을 참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해리포터>의 ‘퀴디치’를 떠올리게 하는 공기 원소들의 멋진 ‘에어볼’ 경기와 물 속에 잠긴 ‘비비스테리아’의 황홀한 비주얼도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었던 디즈니픽〮사의 전작들을 생각하면, <엘리멘탈>의 제자리 걸음은 아쉬움을 더욱 크게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