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을 찢고 나오라

<성스러운 거미>, 감독 알리 아바시

by 서리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8829_1678337326.jpg © Profile Pictures, ONE TWO Films

영화 <성스러운 거미>는 정체화와 타자화의 문제를 판타지의 힘을 빌려 다룬 영화 <경계선>으로 이름을 알린 이란 출신의 감독 알리 아바시의 신작이다. 영화는 2000년부터 2001년 사이, 이란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자 이슬람 성지인 마슈하드에서 실제로 벌어진 연쇄 살인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다. 살인마의 이름은 사이드 하네이. 1년 간 16명의 여성을 살해한 그는 시체를 천으로 칭칭 감아 유기하는 방식으로 ‘거미 살인마’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는데, 체포되고 나서도 자신의 범죄를 반성하기는커녕 피해자를 조롱하고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결국 사이드는 법의 심판에 따라 사형에 처해졌지만, 사건에 대한 이란 정권과 국민들의 미온적인 반응과 일부 보수 세력의 열렬한 지지는 그의 범죄 행각만큼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감독 알리 아바시는 인터뷰에서 해당 사건을 실제로 목격한 이후 15년 이상의 긴 시간동안 이를 영화화하기 위해 힘써왔다고 밝혔다. “연쇄살인마를 잉태하는 사회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그의 인터뷰 내용처럼, 영화는 보통의 범죄스릴러 영화처럼 베일에 싸인 범인의 행방을 치열하게 추격하기보다 이를 직•간접적으로 둘러싼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데 더 성실하다. 때문에 스릴러라는 장르 영화의 쫓고 쫓기는 긴장감과 전율을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미지근하게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반대로 영화 내내 불안하게 흔들리며 여성들의 뒤를 끈질기게 밟는 카메라가 한 사람의 살인마가 아니라 마슈하드라는 도시를, 나아가 사회 전체의 시선을 대신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이보다 더 공포스러운 범죄 영화도 없을 것이다.



28829_1678337363.jpg © Profile Pictures, ONE TWO Films

영화가 첫 번째로 그려내는 인물은 피해자 여성이다. 10분이 조금 넘는 긴 오프닝 시퀀스가 보여주는 정보는 그가 성매매 여성이라는 사실 그 이상이다. 그에겐 어린 딸과 자신의 목숨이 걸린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있다. 일을 나가기 전 딸에게 건네는 입맞춤과 성지 앞에서 올리는 짧은 기도는 그가 성매매를 돈벌이 수단으로 선택했을 지라도 영혼만은 사랑과 신앙이라는 거룩한 가치를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뒤이어 세 명의 피해자를 보여줄 때도 그들이 ‘창녀’라는 이름으로 단순히 묶을 수 있는 타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딸이자 친구이며 각자의 개성을 가진 개개의 사람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파는 사람이 있다면 사는 사람도 있는 법. 그러나 파는 자가 어떠한 사회적 보호도 받지 못하고 모욕과 학대를 감내해야함에 반해 사는 자는 아무 죄책감 없이 가정의 수호자 자리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가뿐히 유지한다. 몸을 판 여성은 저항할 틈도 없이 살해당하지만 몸을 산 남성을 위협하는 것은 아내와 이웃의 눈치가 고작이다. 그를 길바닥으로 내몬 사회적 구조와 성매매를 할 수 있게 만든 그의 고객들에 대해서는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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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주인공 라히미다. 라히미는 여성 저널리스트로 거미 살인마를 취재하기 위해 마슈하드에 도착한다. 취재는 쉽지 않다. 정부와 경찰의 소극적인 수사와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 만으로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이다. 거리의 ‘창녀’들과 달리 립스틱을 지우고 히잡으로 머리카락을 가리지만 그럼에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멸시와 희롱의 시선은 정도만 다를 뿐 그들에게 가해지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자신을 미끼로 한 라히미의 함정에 빠져 체포된 사이드 역시 기자의 신분으로 다시 자신을 찾아온 라히미에게 그를 죽이지 못해 아쉽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한다. 즉, 사이드에게도 그가 진짜 매춘부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러운 창녀를 없애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 싶었다’는 그의 말은 지하드의 신념이 담긴 선언이 아니라 여성 혐오에 대한 자가당착적 변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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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만적인 살인마가 영화가 그리는 세 번째 인물이다. 실제 사건에서 사이드 하네이는 살인을 저지르기 전 피해자를 수차례 강간했지만, 영화 속의 사이드 아지미는 피해자 여성과의 성적 접촉을 피하며 자신이 신성한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의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살해 동기의 상당부분을 종교적 독선주의가 가지는 허위와, 이를 경계하긴커녕 부추기고 동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영화는 그러면서도 사이드라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비정상성’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는다. 위협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잡으려 달려드는 모습, 죽은 여성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는 모습, 상대가 고분고분하지 않자 원칙을 깨고 살인을 위한 도구를 골라보는 모습 등은 그의 폭력성과 위선, 또 그를 통해 가리려 했던 나약함을 차례로 보여준다. 그리고 극 중 세번째로 살해된 여성을 통해 이를 노골적으로 비웃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제외하면 낮 시간 동안의 사이드는 평범한 이웃이자 성실한 노동자이며, 충실한 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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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영화는 마지막으로 그의 가족들을 주목한다. 남편이, 아버지가 살인자라는 사실은가족을 일시적으로 충격에 빠트리지만, 사이드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시민들의 연호 속에서 그들은 선량한 양심을 어둠 속으로 감추고 진실을 외면할 핑계를 얻는다. 사회적 취약 계층의 여성을 성매매 현장으로 내몰고, 성녀와 악녀의 이분법적 구별을 통해 여성을 통제하고, 마침내 종교적 신념의 얼굴을 한 혐오 속에서 사이드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사회는 이제 그 아들을 통해 괴물을 복제하기에 이른다.


사건이 종결된 이후 마지막 장면에서 라히미가 다시 돌려보는 아들의 인터뷰는 사실 <And Along Came a Spider(거미 살인)>(감독 마지아르 바하리)라는, 동일한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속 실제 아들의 인터뷰와 대부분 일치한다. 아들의 말(대사)과 행동은 물론 화면 구도와 아들이 입고 있는 셔츠까지도 거의 동일하게 연출했다. 그래서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유일하게 새로이 창작된 존재, 사이드 하네이의 딸이다. 실제 인터뷰에서 아들은 쿠션을 가지고 아버지의 범죄 현장을 재현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는 거기에 더해 자기 여동생을 불러 피해자의 역할을 대신하게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아이는 카펫에 감싸인 채로 까르르 웃고, 카메라는 묵묵히 그 무구한 얼굴을 비추며 이야기를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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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그리고 사이드 자신의 믿음은 결국 배신당하고 살인자 아버지는 사형에 처해졌다. 이제 남은 가족의 삶은 어떻게 될까? 그의 막내딸이 생활고에 못 이겨 짙은 화장을 하고 머리카락을 빼낸 채 밤 거리에 설 일은 정말 영영 생기지 않을까? 사이드의 손에 죽은 여성들 역시 누군가의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딸로 그려진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이 마지막 장면을 첫번째 장면과 이어 붙여보면 그 답은 더욱 분명해진다.



사실 오프닝 시퀀스 마지막에서 <성스러운 거미>라는 타이틀 뒤로 펼쳐지는, 마치 거대한 거미줄같이 보이는 도시의 전경은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영화의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철저한 자기 반성과 대대적인 인식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 사회 전체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 공고한 거미줄로서 거미의 집이자 사냥터의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탁 아래 거미는 가장 가장자리에서부터 배를 채우다가 마침내 자기 자신의 딸마저 잡아먹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성스러운 거미>는 이러한 현실에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가상의 여성 라히미를 통해 현실 속 ‘라히미들’에게 외치는 절박한 격려다. 영화 속 라히미가 거미를 죽였다면, 현실 속의 라히미들은 그 거미줄마저 찢고 나올 것이라는 간절한 기도고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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