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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Apr 12. 2023

관계 연못 가꾸기

우리는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니까

엄마는 독특한 습관이 있다.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면 얼마 되지 않아서 눈을 푹 감고 코를 드르렁 곤다. 자는가 싶어서 티브이를 끄려고 하면, 엄마는 언제 잠들었냐는 듯이 깨어나 말한다.

 "놔둬."

 티브이를 끄려고 리모컨을 쥔 손이 멈칫, 나는 당황한 채 입을 연다.

 "엄마, 아까까지 코 골면서 자고 있었잖아."

 "응? 안 잔다."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는 다시 티브이 시청에 골몰한다.


 이것은 오랜 미스터리였다. 한 번은 왜 그러느냐고 엄마에게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다 엄마는 외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외할머니도 옛날에는 지금 엄마와 똑같은 습관이 있었다고 했다. 잠귀가 밝아 조그만 움직임도 알아차리고 깼다고. 곤히 잠든 할머니를 보고 티브이를 끄려고 조용히 리모컨을 들면, 꼭 깨어나서 안 잔 척을 했다고. 할머니를 회상하며 엄마는 말을 덧붙였다.


"나도 그때 진짜 이해가 안 됐거든. 근데 내가 그러고 있네. 신기하게."



 가족과 친구를 포함해서 우리가 인간관계를 맺을 때는 크게 두 가지 영향력이 발휘된다. 첫 번째는 자주 보는 이들의 모습을 닮게 된다는 사실, 두 번째는 대상과 상황에 맞게 내가 변형된다는 사실이다. 두 가지 모두 비슷한 말이다. 자주 마주하는 관계 속에서 나의 모습도 미묘하고 미세하게 바뀔 수 있다.

 한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많은 것을 설명하기도 한다. 나와 가장 친밀한 다섯 명의 평균이 나의 현재 모습에 가장 가깝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부모, 자매, 형제, 친구에서부터 학교 선생님, 직장동료까지도 우리는 필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요즘에는 사람을 좀 걸러서 만나게 돼요."

 최근에 만난 지인이 말을 꺼냈다. 그는 옛날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점점 술에 약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친구들과의 만남도 꺼리게 됐다. 친구들이 부르면 예전에는 꼭 나갔는데, 요즘에는 원하지 않을 땐 거절한다고 했다. 옛날과 다른 모습을 보이니 아쉬운 소리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또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친구들과 만나면 왠지 술만 먹고 시시한 이야기만 하게 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뭔가 이렇다 할 대화가 없더라고요."


 대화란 사전적 의미로 '서로 마주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와 상대방의 이야기가 태엽처럼 맞물리면 대화의 정원은 조화롭게 꾸려진다.

 세간의 가십거리나 소위 씹는 말이 아니라, 진득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있을 때 만남의 시간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다채롭게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얻는 열매는 일상에도 신선한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관계로부터 얻는 영향력을 깨닫고 난 후에는 내가 닿는 한 사람 한 사람, 한 순간 한 순간이 더욱 의미 깊고 소중해진다.

 이는 또한 사람을 '걸러서' 만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이 정수기 물도 아니고 거른다고 표현하니 좀 매정하지 않은가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러나 다양한 이들과 관계를 맺다 보면 내 곁에 둘 사람을 쉽게 들이면 안 되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 때가 종종 있다.


 관계의 연못이 넓고 깊어질수록 그 속의 생물 피라미드도 다변화한다. 이를테면 개구리와 민물고기만 살던 연못에 청둥오리가 놀러 오기도 하고, 느닷없이 뱀이 출몰하기도 한다. 또는 돌 틈새에 스멀스멀 이끼도 낀다. 연못 생태계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다가 만일 느닷없이 뱀이 나타나 개구리들을 모두 잡아먹어버린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생물 피라미드는 금세 휘청거릴 것이다. 연못에 사는 다양한 생물들을 뱀으로부터 보호하고 주변에 이상 징후가 없는지 끊임없이 관찰하는 부지런함이 필요한 이유다.


 관계를 잘 가꾸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앞서 엄마가 할머니의 티브이 보는 습관을 본인도 모르게 답습했던 것처럼, 가까운 이의 습관이나 행동은 쉽게 옆 사람에게 전염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으스스하기도 하다. 나는 분명 나의 태도와 행동을 정성스럽게 가꿀 책임이 있다.


나는 분명 나의 태도와 행동을 정성스럽게 가꿀 책임이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관계 속에서 상처를 내지만, 관계로부터 치유하기도 한다. 사랑에 증오가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지 않을까. 어둠이 있기에  줄기 빛이 더욱 소중하다. 인간관계를 맺고 함께 계절을 지날수록 관계 속에서 넘을 언덕도 가팔라진다. 그럴 때면 힘든 마음이 앞서고 쉽게 심정고약해진다.

 연못이 꽝꽝 얼어 어떤 생물도 찾아올 수 없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곳저곳 이끼도 끼고 뱀도 출몰하는 게 더욱 건강한 모습이 아닐까 스스로 위로해 본다. 또한 뱀을 잡으러 가는 길목에서 날개가 눈부시게 빛나는 청둥오리를 만날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활짝 핀 수련을 마주칠지도 모른다.


 관계를 통해 겪는 언덕을 오르느라 헉헉대기도 하고 물씬 출몰하는 뱀을 마주치느라 고약해지는 심경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어 연못을 부지런히 돌보기로 마음먹는다. 애증이 공존하는 그곳에는 가능성과 희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꽝꽝 얼은 연못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을 아름다움을 마주칠 기회이기도 하다.

 더불어 연못자리 곳곳에 숨은 뱀을 잡는 냉철함을 가슴 깊이 새겨야겠다. 왼손에는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든 자의 자세로 균형 있고 건강한 연못 생태계를 가꾸어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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