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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서 May 21. 2022

월급 180만 원 대기업 규정입니다

내 월급은 도대체 얼마까지 깎이는 걸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사전기획기간이 끝나고 촬영에 들어가자 이제야 방송을 하겠구나라는 생각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항상 이것보다 더 힘든 게 있을까?라는 의문의 나날이지만 늘 더 힘든 일들이 존재했다.


촬영 준비는 전쟁과도 같았았다.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완대본이 나왔고.

그때부터  밑에 작가들은 대본의 오타체크와 프롬프터를 만드느라 거의 숨도 못 쉬고 회사에서 밤을 새웠다.


60장 분량의 대본을 45부를 뽑아야 했고 심지어 하루에 2회분을 녹화하기 때문에 수량은 그 두배였다. 촬영장에 도착해야 하는 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는 도망가고 싶었다. 잠도 못 자고 빈속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연신 대본을 내뱉는 복합기의 뜨거움 때문인지 땀을 흘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여기에 게스트용 대본은 따로 만들어 뽑고 대기실 표, 연예인용 간식과 휴지 별 잡다한 것을 배낭에 넣어 짐을 쌌다. 밤을 꼴딱 세운 작가들은 자기보다도 큰 짐가방을 저마다 들처메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서로의 초췌한 모습에 웃음이 나기도 했고 측은한 마음에 눈물이 나기도 했다.


대기실 세팅이 끝날 무렵에 메인작가님들이 도착했고 첫 촬영에 한껏 긴장한 나는 그날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 다들 대기실 구석에서 도시락으로 배를 채웠지만 나는 복도에 혼자 나와 서성였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막내 작가의 계급은 너무 밑바닥이었다. 조연출들은 자기들이 나의 상관이라도 되는 것 마냥 선배 작가들이 보지 않는 틈에 나에게 명령을 해대기 일수였고 내가 부탁한 일마저 제대로 해놓지 않아 결국에는 내가 다시 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감에다가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서 그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죽도록 열심히 하는데, 죽도록 힘들어지기만 하는 것 같았다.


복도의 막다른 곳에서 누가 볼세라 눈물을 닦고 씩씩한 척 촬영에 임했다.


오전 10시 스탠바이,

오후 1시 1부 녹화

오후 7시 2부 녹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촬영은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마무리가 됐다.

대본을 가슴팍에 꼭 껴안고 꾸벅꾸벅 조는 선배 작가들을 보니 같은 처지임에도 그들이 안쓰러웠다.


모두가 떠나고 우리는 촬영장에 남겨진 대본을 회수하고 짐을 챙겨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사무실에 짐을 던져놓고 비몽사몽 한 채 각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4시가 돼서야 집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쓰러졌고 다음날 오후 12시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이틀 밤을 새웠던 그 피로는 3일이 지나도 풀리지 않았다. 내 몸은 경고라도 하는 건지 하혈까지 하고 말았다. 참 요란한 신고식이었다.


녹화를 마친 첫 출근에서 나는 피곤했지만 해내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래도 하나하나 해내가고 있다고 발전하고 있다고 잘하고 있다고.


그런 나를 메인작가는 조용히 부르더니 말했다.


'너 페이 47 주기로 했던 거 말이야. 그거 45가 규정이라네. 45로 지급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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