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시간은 달랐다.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다.
갑자기 여행 계획이 서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정원에 물을 못 주면 안 될 텐데..'였다.
건조한 봄이었고, 식물이 겨울을 깨고 세상에 나와서 한창 먹고 자랄 유아기인 5월이었기 때문이다.
새순이 커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5월의 정원 식물들은 사람에 빚대면 엄마 손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유아기 같다는 생각이었고. 물도, 볕도, 거름도 많이 먹어야 건강한 여름의 청년기를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못 먹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먹거나 다쳐도 문제였다. '여리고 작은 식물들이 물이 부족해서 마르지나 않을까?, 비가 많이 와서 과습으로 잘못되지나 않을까?, 바람이 세게 불어서 가지가 꺾이면 어떡하지?' 마치 유아기 딸아이를 집에 두고 외출을 하는 엄마 마냥 과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따져보니 여행은 2박 3일이 아니고, 2박 2일이었고, 집을 온전히 통으로 비우는 날은 겨우 하루였다. 출발하는 날 아침에 정원에 가득 물을 줄 수 있었고, 돌아온 날 저녁에 또 살필 수가 있는 것이었다. 하루, 겨우 하루만 내 눈에 내 반려식물을 담지 못하는 것이었다.
2박 3일이면 어떻고, 5박 6일이면 또 어떨까만, 떠나기 전의 내 마음은 온통 정원 걱정뿐이었다.
비행기, 전철, 택시, 도보, 이동하는 시간이 많은 여행이었고, 구경하고, 먹고, 얘기하고 노느라 실상은 여행지에서 정원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보냈다. 떠날 때의 마음과 달리 3일 동안 정원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전에 집을 나서서, 3일째 오후에 집에 돌아왔다. 겨우 사흘이었다. 정확하게는 이틀하고 반나절 만이었다.
차에서 내리는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주차장 옆의 보리수나무였다. 잎이 많아지다 못해 펌 할 때가 한참 지난 숱 많은 내 머리 같이 덥수룩하게 우거졌고, 흰 꽃이 떨어진 자리에 녹색의 타원형 작은 열매가 가득 달려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작은 정원은 초록이 더 무성해졌고, 안 보이던 꽃이 더러 펴 있었다.
보라색 커다란 으아리 꽃이 접시처럼 납작하게 펼쳐져 있었고, 진분홍 사계 패랭이가 눈이 부시게 작은 꽃들을 무수히 내놓고 있었고, 한 달 내내 봉우리만 보였던 빨간색 버베나 작은 꽃이 옹기종기 모여서 강렬하게 펴있었다. 노란색 비덴스는 키도 훌쩍 자라서 꽃송이도 여러 개로 늘어나 있었고, 초록잎만 있었던 난쟁이 패랭이도 수줍게 작고 진한 분홍꽃을 귀엽게 보여줬다. 안 보이던 장미 꽃봉오리가 보였고, 백합과 나리는 부쩍 키가 컸고, 시들하던 남천은 초록 새 잎으로 건재하다고 알렸고, 수국은 잎이 더 풍성해져 있었다.
씨 뿌린 상추, 깻잎은 키가 부쩍 커졌고, 고추 모종에 작고 귀여운 꽃이 여러 개 달렸다. 가지치기를 해서 너무 작은 옷을 입은 듯했던 뽕나무는 놀랄 만큼 가지가 자라서 잎이 무성해졌고, 오디도 제법 굵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배롱나무였다. 가지치기를 하고 작은 새순이 올라온 나무를 매일 관찰을 했고, 여행을 떠나던 아침에도 언제나 가지가 자랄까 싶어서 아직은 몇 개 안 되는 새 잎을 봤었는데, 나무 기둥 아래부터 가지 끝까지 작은 잎들이 빼곡히 돋아나 있었다.
정원의 식물들이 전체적으로 풍성하고 건강해졌다는 사실은, 나처럼 세세하게 식물들을 관찰하지 않는 남편 눈에도 보였는지, 며칠 사이에 꽃밭이 정글이 되었다며 오버를 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여행 기간 동안 비가 두 차례 많이 내렸고, 날이 무척 따뜻했다고 한다. 그래도 겨우 사흘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봄의 정원은, 유아기의 식물들은, 몰라보게 성장해 있었다. 봄비라는 모유를, 봄볕이라는 사랑을 자연은 한없이 주고, 주고, 또 주었던 것이었다.
겨우 3일, 인간에게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봄의 식물에게는 꽤나 긴 시간이었다. 내 눈에 안 보였던 그 시간은 비와 볕을 충분히 먹고, 받은 시간이었고, 더 크고, 더 토실해진 시간이었다.
자연의 시간 앞에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움을 느꼈다. 식물이 자라는 속도는 인간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안 되는 것이었고, 사람의 정성과 사랑이 아무리 큰들, 자연의 비와 볕에 견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봄의 정원 앞에 서면, 내 고민도 힘듦도 한낱 작은 흙부스러기가 되어버린다. 자연의 경이 앞에, 자연의 시간 앞에 인생사 한 줌 거리가 되어버린다.
오늘도 내 작은 정원 앞에 선다. 밤사이 또 부쩍 자란 식물들과 커진 꽃봉오리와 많아진 꽃의 개수와 늘어난 열매의 수를 보며 시간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자연의 시계 침은 오늘도 90배의 속도로 빠르게 돌고 있다. 해바라기 씨앗이 2개의 떡잎을 내민 지 얼마나 되었다고 척추를 곧게 펴고 하늘을 향하고 있고, 초록 오디가 시나브로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작은 봄의 정원이 거대한 초록의 외계 같다.
지구 인간의 느린 시간을 보며 빠르게 사는 외계인이 가소롭다 말하는 것 같다.
90년의 시간을 가진 자가 1년의 시간을 가진 자 앞에 경외를 느낀다.
날마다, 매 시, 매 분, 매 초마다 내가 숨을 쉬는 90배의 속도로 식물은 살고 있다.
'피곤하다, 지친다'를 입에 달고 사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