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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초유 같은 봄비

봄비가 내린다.

차가운 땅을 뚫고, 단단한 가지도 비집고, 용기 있게 돋아난 내 작은 정원의 연둣빛 봄 위로 촐촐히 비가 내린다.


주택으로 이사를 한 지는 3년 차, 정원을 가꾼 지는 2년 차가 되었다.

첫 해는 이사만 해놓고, 큰 나무 몇 그루만 대강 심어 놓고 인도에 가야 했고, 두 번째 봄에 다니러 왔을 때는 식물에 대한 기초 지식도 없이, 내 눈에 그저 예쁘거나, 키우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들을 충동적이고, 즉흥적으로 사들였다.


봄에 심고 키워서 여름 내내 화려한 정원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으로, 그대로 충분했다. 그 화초들이 겨울을 어떻게 나고, 후년 봄에는 어떤 모습이 될지는 예측도 안 해봤고, 염려도 되지 않았다. 고르는 재미, 심은 재미, 키우는 재미, 그것만으로 행복했다.


작년 6월의 정원 모습


여름의 화려함이 지고, 낙엽이 떨어진 가지 위에 적막함이 내려앉은 가을이 되었다. 정든 내 정원을 두고 다시 인도에 가야 했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크리스마스 전에 이르게 귀국을 하게 되었다.


주택으로 이사 후 3년 만에, 처음으로 겨울을 지내고 봄을 맞는 정원과 함께 할 수 있었다. 단단한 땅을 뚫고, 그 보다 더 단단해 보이는 나무도 뚫고 초록의 봄이 자라기 시작했다.


막무가내로 심었던 화초들은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땅속에서 얼어 죽은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노지월동이 되는 화초들도 새순이 보일 때는 잡초와 구분이 되지 않아서 모종삽에 허무하게 파헤쳐진 것들도 많았다.

화려했던 작년의 정원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허허롭고, 쓸쓸하게 빈 땅이 더 많았다.


3월 17일과 4월 5일


심기일전해서 다시 정원을 가꾸어보기로 했다.


큰 나무들은 가지치기를 했고, 월동을 해서 살아남은 화초들은 다 자랐을 때의 키와 꽃크기와 색깔을 고려해서 재배치를 하며 옮겨 심었고, 새로 구입 할 화초들은 중부지방에서 노지월동이 되는 것들로만 골라서 빈 땅에 고르게 심었다. 작은 새순이 올라오는 것들은 표식을 해서 땅을 파헤치는 우를 막았다. 작은 텃밭 구역에는 상추와 깻잎 씨앗도 뿌렸다.


잘 자라기를 바라며 매일 이른 아침에 물을 흠뻑 주었지만 배롱나무에도, 뽕나무, 대추나무에도 새순은 보이지 않았고, 씨앗이 썩어버렸나 걱정이 될 정도로 상추와 깻잎은 감감무소식이었고, 새로 사서 심은 작은 화초들은 좀처럼 생기가 돌지 않아서 자리를 못 잡는 줄 알았다.


4월 18일


내내 춥던 날이 조금 풀리나 싶더니, 비가 내린 다음 날이었다.

거짓말을 하듯이 나무에는 새순이 돋았고, 씨앗은 작은 잎을 땅 위로 내보내었다. 시들하던 화초들은 허리를 꼿꼿이 폈고, 꽃망울들은 활짝 얼굴을 보여줬다.


수돗물을 그렇게 뿌려대도 꿈쩍 안 하던 정원에 봄비를 맞은 식물들이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가끔 비가 내렸고, 비를 맞은 정원은 다른 날과는 확연히 다른 생명력을 자랑했다.


4월 22일 봄비가 내리던 날


오늘도 봄비가 내린다.

단단한 가지를 뚫은 연한 배롱나무 새순도, 연둣빛 풍성한 목련잎도, 반짝이는 새순을 내민 대추나무도, 어느새 귀여운 초록 오디를 단 뽕나무도, 이른 꽃을 피운 보리수도, 뿌리가 부실해서 걱정했던 새로 사서 심은 벚나무도, 겨울을 이긴 백합, 나리, 장미, 휴케라, 아스타, 달맞이꽃 등과 꽃잔디, 철쭉, 패랭이, 으아리 꽃이, 새로 심은 버베나, 베로나카, 라일락 꽃이, 상추와 깻잎 순이 봄비를 듬뿍 마시고 있다.


5월 5일


마치 엄마의 초유를 빨듯이 정원의 식물은 봄비를 행복하게 빨고 있다.

엄마 자궁을 나와서 낯선 세상에서 살 힘을 얻으려고 엄마의 첫 젖을 먹듯이, 겨울 땅과 단단한 나무를 나와서 세상과 맞설 준비를 하려고, 영양분 가득한, 분유와는 다른 엄마의 첫 모유 같은, 수돗물과는 다른 봄비를 흠뻑 들이키고 있다.


비가 그치면 또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 충분히 기대되고, 상상이 되는 내 작은 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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