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가지에 연두 새싹이 돋고, 하얀 꽃이 피고, 초록 열매가 열리더니, 드디어 6월의 햇살을 한껏 머금고 해 보다 더 붉은 열매가 송골송골 귀엽게 달렸다.
작은 정원이 있는 주택으로 이사 와서 그 해 봄에 보리수나무를 심었다. 계획에 없던 선택이었다. 화원에 나무 구경을 갔다가 앵두도 아닌 것이, 오미자, 구기자도 아닌 것이 빨간 열매가 대롱대롱 예쁘게 달려있는 나무가 눈에 띄어서 화원 사장님께 여쭤봤더니 무심히 열매를 따서 건네며 맛을 보라고 했다. 보리수 열매라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 본 나무고, 열매였다. 단단한 열매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약간 말랑한 느낌의 열매는 입안에서 새뜻이 과즙이 터지는 순간, 달콤, 새콤 그리고 떫기까지 한 다채롭고 재미있는 맛을 가지고 있었다.
열매 맛도 맛이지만, 강렬한 빨간색의 타원형 열매가 귀걸이 마냥 가지마다에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에 홀려서 즉흥적으로 사 온 나무였다. 나무 크기나 생김새는 안중에도 없었다.
우리 집 정원에 온 보리수나무는 빨간 열매를 모두 떨군 후에야 나무 생김새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은 잎이 시든 것 마냥 쭈글쭈글해서 새 땅에 적응을 못하고 죽는가 싶었다. 강렬한 열매에 눈이 가려서 나무 형태나 잎모양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열매가 떨어지고 난 나무는 외관이 볼품없어 보였다. 가을을 보내며 잎이 말라서 떨어졌고, 가는 가지들만 썰렁하게 남아서 겨울을 지내는 동안, 괜히 구입했나 싶기도 한 나무였다.
정원에 당당히 심겼던 나무는 이파리가 시든 것처럼 쭈글 해서, 단지 안 예쁘다는 이유로 이듬해 봄에 주차장 옆으로 옮겨 심기게 되었다.
첫 해는 붉은 열매가 제법 달려서 새도 와서 먹고, 택배아저씨도 오가며 따 먹었는데, 옮겨 심은 나무는 꽃이 피자마자 병충해를 입고 말았다. 과실수는 병충해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서 천연 해충제를 뿌렸지만 너무 늦은 모양이었다. 꽃이 떨어져서 바닥에서 말라가는데, 내 마음도 함께 말라가는 듯했다. 열댓 개만 겨우 살아남아서 그래도 빨갛게 익어주었다.
세 번째 봄을 맞았다.
살아있는지가 의심될 정도로 바짝 마른 가지마다에 초록잎이 수없이 달리더니, 작년보다 가지도 풍성해지고 키도 많이 자라서 첫 해의 그 나무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보리수나무의 성장 속도는 다른 나무들보다 월등했다.
여전히 잎은 쭈글쭈글 오므라 든 것처럼 생겼지만, 잎이 풍성해지고 나무가 커지니까 세세하게 잎모양이 보이지 않고 나무 전체가 한 덩어리로 눈에 들어왔고, 나무 자체로도 충분히 훌륭했다.
그 풍성한 나무에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면 얼마나 예쁠지 상상을 하며, 꽃이 피기 전에 서둘러 해충제를 뿌려서 만반의 대비를 했다.
하얀 꽃이 엄청나게 많이 피길래, 올해는 보리수 열매를 많이 보겠구나 기대했는데, 잎 뒷면에 작은 검은 벌레를 다닥다닥 붙이며 또다시 마른 꽃을 마구 떨어뜨리고 말았다. 한번 더 천연 해충제를 뿌렸고, 다행히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죽은 벌레들이 잎 뒤편에 까맣게 달라붙었지만 흰꽃 꽁무니에 초록색 열매를 달았고, 서서히 주황색이 되더니 어느새 빨간 열매가 나무에 가득가득 달렸다.
초록잎 사이마다에 보색의 빨간색 점을 찍은 듯한 열매는 시각적으로 너무 앙증맞고 사랑스러웠다.
단단했던 열매는 차츰 말랑해졌고, 대문 밖을 오갈 때마다 한두 개씩 따서 씨를 퉤퉤 뱉으며 먹는 재미는 더할 나위 없었다.
추운 겨울도 견디고, 병충해도 이긴 내 보리수나무는 봄과 여름의 중간 즈음인 6월을 지내며 햇살을 가득 머금고 빨갛고 말랑해져서 눈과 입을 즐겁게 만들었다.
비바람 예보가 있던 날, 푹 익은 열매가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날, 과감히 보리수 열매 수확을 했다. 고개를 쳐들고 팔을 뻗어서 엄지와 검지 끝에 젤리처럼 말랑한 촉감을 느끼며 열매를 하나씩 땄다. 농부들의 그것에 댈 것은 아니지만, 수확의 기쁨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마치 반짝이는 루비가 가득 담긴 듯, 소쿠리에 보리수열매가 담겼다. 두고두고 먹고 싶어서 청을 만들었다. 두 딸과 나눠먹기에 양이 부족한 것 같아서 오디 열매도 섞어서 작은 유리병에 인도에서 산 꿀을 켜켜이 채우고, 맨 위는 설탕을 덮었다.
맛이 어떨지는 모른다. 양이 중요하지도 않다. 그저 내가 기른 나무에서 수확한 열매이고, 그 열매로 담근 청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을 뿐이다.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나라, 인도산 꿀의 달콤함과 내 정원에서 자란 보리수 열매의 상큼함이 잘 어우러져서 인도의 추억과 정원의 낭만이 한여름 여러 날에 우리 가족의 입안에서 만끽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