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종교, 같은 마음
템플 내의 박물관은 마치 큰 사각형 암석 안에서 일정하게 간격을 맞춘 돌기둥 사이를 탐험하는 느낌이었다. 템플 전체 규모에 비해 박물관은 아주 작은 구역이었는데도, 그 안의 조각 돌기둥만 무려 천 개라고 했다.
박물관을 마지막으로 한 시간 동안의 템플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존슨이 달려와서 "마담! 럭키!"라며 목소리에 흥분감을 담고서 소리쳤다.
서문 근처에는 힌두교인들이 신으로 섬기는 소를 키우는 장소가 따로 있었는데, 바깥의 일반 소와 구분되는 순수혈통을 지켜야 해서 그 안에서 따로 키운다고 했다. 하루에 한 번 그 소가 사람들을 만나러 나온다는데, 마침 소가 행차하는 그 장소, 그 시간에 우리가 있었던 것이었다.
화려하게 치장을 한 하얀 소와 아기 코끼리가 박물관 앞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마당으로 나왔다. 그보다 더 현란한 수레는 힌두교 대표 신상 세 개를 태우고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템플 곳곳을 누비다가 다시 돌아간다고 했다.
존슨 말대로 럭키였다.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관광객의 시선에는 신이 아니라 서커스단의 동물과 재미있는 인형 같아 보였지만, 소를 보며 두 손 모으는 그들에게는 분명히 신이었다. 사진을 못 찍게 관리도 철저했다. 그들의 살아있는 신을 보는 것으로 인도 최대 힌두 템플 구경을 마쳤다.
밖으로 나왔다. 들어갈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매표소 앞과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템플의 동문 쪽을 향했다. 주차된 곳으로 가려고 템플 동문과 마주 한 낡은 석조 상가 건물 안을 다시 통과했다. 문 닫힌 아침에는 으스스했던 그곳이 장사가 시작되니까 활기가 넘쳤고, 완전 다른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조명이 켜졌고, 재봉틀 돌리는 소리와 상인들의 흥정하는 목소리가 긴 상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템플에서 그곳을 가게로 세를 놓았고, 그 가겟세로 '미낙쉬 암만 템플'의 관리 비용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그래서 입장료가 없었던 것이었다. 참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을 했다.
그즈음에 크리스천인 나는 '깐얀꾸마리'부터 '마두라이'까지 3일 동안 너무 많은 힌두신을 봐서인지 좀 혼란스러웠다. 쉬지 않고 힌두교 안에서만 지낸 탓인지 템플 구경이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머리를 좀 식히고 싶어졌다. 검색을 해보니까 근처에 예쁜 성당이 보였다. 그곳에 잠시 들렀다가 출발해도 첸나이에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사람 사는 구경을 하면서 성당을 찾아갔다. 템플 안이 '환상'처럼 느껴졌다면, 차창 밖은 '현실'이었다. 신의 세계가 아닌 사람의 세상이 보였다. 열심히 살고 있는 그들이 템플 안의 힌두 신보다 내 눈에는 더 거룩하게 보였다. 한결 눈도 편안했고, 마음도 안정되었다.
성 메리스 성당(st, marys church)에 다다랐다. 한눈에도 외관이 너무 예쁜 성당이었다. 퐁디셰리 외에는 그동안 내가 인도에서 본 성당들은 거의 대부분이 하얀색 페인트칠만 되어있었는데, 그곳의 성당은 흰색에 파란색 테두리가 칠해져 있어서 동화책 속의 예쁜 성처럼 보였다. 외관보다 성당 내부는 더 예뻤다. 흰색과 주황색의 조화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기둥은 모두 거대한 핑크색 대리석이었다. 연핑크 대리석 둥근기둥과 짙은 주황색 나무는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며 너무나 근사했다. 흰색, 주황색, 핑크색의 조화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 안에 앉은 기도하는 사람들까지도 성당 건물과 함께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였다.
성당 밖은 차가운 색, 안은 따뜻한 색, 인도 사람 다운 과감한 색 선택이었다. 너무 혼잡한 힌두 템플만 보다가 심플한 듯, 화려한 성당 건물에 마음을 온통 빼앗겨 버렸다. 이내 마음이 평온해졌고, 너무 잘 왔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존슨의 좋아하는 마음도 읽혔다.
힌두교 템플에서의 그들과 성당에서의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각각의 장소에서 얻고 있었다.
성당 뒤편에는 학교가 있었는데, 아마도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교인 것 같았다. 인도는 그런 곳이 많아서 그럴 것이라 짐작이 되었다. 우리를 보더니 교복 입은 인도 아이들이 반갑다며 손을 흔들었다. "왓즈 유얼 네임?" 이란다. 인도에서 '왓즈 유얼 네임'은 '헬로'와 같은 의미라고 보면 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는 인사이다. 이름을 물어서 이름을 알려 줬는데 그 이름을 기억 못 한다고 섭섭해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만날 때마다 이름을 묻는다고 귀찮아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우리 이름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인사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두 번 보고 말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이다.
세상 어느 곳이라도 어린이들은 귀엽다. 그 아이들도 무척이나 귀엽고 발랄했다. 예쁜 성당을 봐서 기분이 환기되었고,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을 만나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는 되었다. 그만 마두라이를 떠나도 되었다. 반나절 마두라이 여행은 인도 최대 템플도 만족스러웠고, 예쁜 성당도 흡족했다.
마두라이에서 첸나이까지는 약 7시간 거리였다. 그때가 오전 11시 30분경이었다. 조금 가다가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고, 베지테리언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남인도 베지테리언들이 점심에 주로 먹는 밀즈(meals)와 빠니르 65(우유 단백질로 만든 두부를 치킨 65 소스에 버무린 음식)를 주문했다.
인도를 떠나기 전에, 가장 인도스러운 음식인 밀즈를 마지막으로 꼭 한번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첸나이가 아닌 여행 중에 먹게 되었다. 다양한 소스가 입맛에 맞아서 싹싹 비벼서 밥 한 그릇을 모두 비웠다. 11년 전에 마주했던, 먹기 거북했던 그 밀즈와 분명 같은 음식인데, 그 나라에서 산 세월이 음식을 대하는 내 입맛도 바꾸었다. 그 날는 빠니르도 맛있었고, 새우깡 맛이 나는 스낵도 괜찮았다. 입가심용 씨앗까지 야무지게 씹고, 만족스러운 점심식사를 끝냈다.
인도에는 합석 문화가 있다. 인구가 워낙 많은 나라이니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사교적인 존슨은 합석한 처음 보는 남자와 10년은 알고 지낸 사이처럼 굴었다. 소스와 밥이 계속 리필되는 음식인데 덩치 큰 존슨은 내가 본 것만도 밥을 세 번 리필했다. 소스와 후식도 여러 번 리필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아이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줘야 했다.
많이 먹어서 졸음운전을 할까 봐 같이 짜이(thai 인도 밀크티)를 마셨다. 짜이 장수 아저씨의 묘기 같은 짜이 붓기는 봐도 봐도 재미있었다. 이런 노점 짜이가 제대로 인 것 같았다. 생강향이 진하고 달고 맛있었다.
우리나라처럼 인도의 고속도로 휴게소에도 잡다한 물건들을 많이 판다. 존슨이 어린 아들 선물로 장난감을 하나 고르길래 내가 사주려고 하니까 아들 선물은 자기 돈으로 사고 싶다고 했다.
결혼 전 닭살스러운 연애 과정부터, 결혼을 하고 딸, 아들 낳는 것까지 다 봐 온 존슨이다. 내내 철이 없어 보이던 아이였는데, 자식 둘의 아빠가 되고 나니까 어른이 된 것 같아서 왠지 모를 기특함이 느껴졌다. "그래, 그러면 네가 계산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집으로 가면 되었다. 첸나이로 출발했다. 마두라이를 빠져나올 때도, 첸나이에 들어설 때도 차가 많이 막혔다. 그래도 저녁시간에 많이 늦지 않게 첸나이 시내에 도착할 수는 있었다. 마두라이 호텔 룸에 비치되어 있던 강정을 챙겨 왔는데 차에서 그걸로 잠시 요기는 되었다. 우리나라 강정과 모양과 맛이 똑같은 인도 강정을 처음 봤을 때 신기해했던 기억이 났다. 그날로부터 11년이 흐른 날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우리가 인도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대견했다.
인도 여행의 마지막은 항상 한국식당이다. 느끼한 인도 음식만 먹었으니 매콤한 한식을 먹어줘야 인도 여행이 끝난 실감을 하게 된다. 두부전골과 김치전이 그날 우리 여행의 마지막 식사였다.
'인도를 떠나면서 인도 여행하기' 계획은 참 잘한 일이었다. 남편의 제안에 동의했고, 계획을 세웠었다. 남인도 3개 도시를 다녀온 날의 그 감정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11년 동안 인도에서 고생한 남편을 위한 여행이었지만 나에게도 인도를 정리하는 시간이 되어 주었다. 인도에 푹 담겨서 인도와 이별하는 시간은 의미가 남달랐다. 3일 후에 떠날 북인도 배낭여행이 더 기대가 되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