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꽃들은 5, 6월에 가장 많이 피고 진다.
장마와 폭염이 이어지는 7월이 되면서 대부분의 꽃들은 견디지 못하고 정원은 초록으로만 뒤덮이고 만다. 원색의 봄은 지고, 초록의 여름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직 꽃 필 준비 중인 여름 꽃들 몇 종류만 꽃망울을 맺고 있을 뿐이다.
다소 늦은 수국이 그렇고, 씨를 뿌려서 키운 해바라기가 그렇고, 연분홍 소담스러울 꿩의비름이 그렇고, 댕강 가지치기를 했던 배롱나무가 그렇다.
그래서 7월의 내 정원은 작은 밀림 같다. 무성히 자란 초록의 잎들만 가득할 뿐이다. 최근까지도 피고 지고를 여러 번 반복하며 오래 남아있던 피튜니아, 애키네시아, 찔레장미, 비덴스도 이제는 기력을 다 한 듯 보인다.
그랬던 초록의 우주에 강렬한 붉은색 우주선이 나타났다.
백 겹의 알뿌리로 꽁꽁 언 겨울의 땅을 견디고, 무지한 내 호미에 찍혔을 뻔 한 고비도 넘기고, 조용히 봄의 땅을 뚫고 올라와서, 꼿꼿한 허리를 펴고 여름의 정원에 섰다.
주변의 많은 화초들이 미모를 자랑하던 그 시간을 모두 지켜보다가 그들이 비와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진 그 순간에 마침내 쭉 뻗은 키와 크고 화려한 얼굴과 누구도 가지지 못한 향기를 뿜으며 도도한 자태를 뽐내고야 만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정원 가득, 백합향이 말도 못 하고, 주방 문을 열고 나오면 초록색만 남은 정원에 강렬한 붉은색이 시선을 빼앗는다.
오래 기다린 만큼 백합은 어떤 다른 꽃보다 큰 존재감을 내뿜는다. 견딘 백합의 시간과 기다린 내 시간이 누구도 흉내 못 낼 미모와 향기로 만난다.
백합꽃은 비록 보름 정도 피어있지만, 백합의 시간은 보름이 아니라 일 년 이라는 것을 정원을 가꾸면서 알게 되었다.
백 겹의 알뿌리로 겨울을 나고, 곧은 줄기와 규칙적으로 층층이 뻗은 잎으로 봄을 보내고, 크고 화려하고 강한 향을 가진 꽃으로 여름을 뽐내고, 화려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흉한 모습으로 사라지지만, 땅속의 하얀 알뿌리가 다시 다음 해를 기다리며 인내한다.
꽃의 여왕을 흔히 장미라고 하는데, 적어도 내 작은 정원의 여왕은 백합이다. 여왕이 아니라 황제가 아닐까 한다.
겨울의 시련 속에도 고귀함을 잃지 않고 새하얀 알뿌리로 살다가, 모두가 잘났다며 뽐낼 때도 오로지 힘을 키우며 조용한 봄을 보내고, 마침내 여름 볕과 장마에 혼자서 도도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힘을 과시한다.
내 작은 정원의 황제는 단연 백합이다.
곧 비참하게 꽃잎은 떨어질 것이고, 잎은 누렇게 시들고, 결국은 그 흔적이 땅 위에서 사라지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 겨울을 지내고 다시 7월의 내 정원에 화려하게 복귀할 것을 믿는다.
지금 내 정원에는 붉은색 백합 옆에서 하얀 수국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 최고의 시간을 보내는 백합을 내려 보며, 만개할 준비 중인 수국이 큰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아직은 흰색보다 연두색이 더 많은 꽃봉오리를.
8월은 백합이 가고 수국이 올 모양이다.
경기 북부 우리 집 정원은 다른 지역보다 느린 시간이 흐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