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우푸푸, 우리숲 이야기 공모전 우수
이른 나이에 장례의 형태를 운운하는 게 경솔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수목장을 하려 한다. 나무 아래에 묻히는 최후라면 꽤 뿌듯한 마음으로 일생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의 방식을 미리 정하는 건 본인과 주변인에게 모두 유용하다. 내가 죽으면 누군가는 수습 및 애도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어떤 단서도, 합의도 남겨두지 않은 사람의 장례는 곤란할 것이다. 폐를 끼치며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장례의 순간에는 죽은 상태일 테니 뒷말을 들을 수도, 평판을 의식하며 스트레스받는 일도 없겠지만.
내가 바라는 수목장은 약간 특이하다. 도시 안에 조성한 수목장 공동묘지에 묻히고 싶다. 이른바 죽은 자의 숲이다. 이름은 무시무시하지만, 나의 상상 속에서 그곳은 싱그럽고 아름다운 장소다. 바람이 불고, 수백 그루의 가지에 달린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린다. 수천 그루라고 하지 않은 까닭은 도시 내에 거대한 숲을 조성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규모의 공동묘지 숲은 남도의 섬처럼 도시 곳곳에 박혀있다. 외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숲은 도시에 공원 형태로 존재한다. 언뜻 보아서는 묘지의 기능을 하는 장소라고 쉬 예상할 수 없다. 점심시간에 머리를 식히기 위해 숲을 찾은 직장인이 한가로이 도시락을 까먹어도 어색하지 않다. 상상력과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은 영혼의 존재를 느끼느라 식사가 불편할 수 있지만, 죽음을 낯설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묘지의 식사도 괜찮다. 여기는 결국 숲이니까.
나는 이탈리아의 피렌체, 로마, 베니치아를 거닐다가 놀란 적이 있다. 공동묘지가 도시에 섞여 들어와 있었다. 성당 인근에 묘지가 있고, 도심과 멀지 않았다. 그 주위를 유유히 산책하는 주민을 보면서 나는 소름이 돋았다. 오랜 기간 학습된 감정 반응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무덤가를 산책 코스로 활용한 적도, 예비 코스 목록에 올린 적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묘지는 사람들의 생활권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심지어 지역에 따라 장례식장에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나, 어린아이를 못 오게 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이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죽음은 꺼림칙한 것, 애써 멀리하고 모른 척해야 하는 것 같은 관념이 무의식에 쌓인다.
나는 윤회전생을 믿지 않는다. 다만 나의 몸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흩어진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안다. 화장으로 뼛가루가 되건, 봉분 속에 누워 있건 탄소 유기체인 나의 신체는 분해된다. 흩어진 내 신체 구성물질은 다른 생명의 재료로 쓰이게 될 것이다. 그런 견지에서 숲의 구성원이 되는 건 꽤 멋진 일이다. 나는 조용히 자라고, 숨 쉬는 나무의 처연함이 좋다. 살아가는 동안에 온갖 희로애락애오용을 겪었으니 죽어서는 무던하고, 굳건한 존재의 일부가 되어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간혹 어떤 분들은 수목장이 망자의 신체를 온전히 보호하기 어려운 방식이라 하여 꺼린다. 이해는 가지만 선뜻 동의하기는 힘들다. 가령, 장기 기증을 하면 신체의 일부가 소실된다. 그렇지만 신체 훼손을 이유로 기증자의 명예가 실추되는 건 아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죽어서 육신을 온전한 형태로 보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죽음 이후에는 전원 스위치가 꺼지는 것처럼 나의 자아도 사라진다고 믿는다. 육체가 생을 다 했기 때문이다. 마치 치매에 걸리게 되면, 뇌 기능 저하로 철학적 자아가 무너지듯 정신과 육체는 연결되어 있다. 이미 생명의 에너지가 고갈된 육체를 인위적인 조치로 부패하지 않게 한다고 해서, 정신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수목장은 겸허한 마음으로 육체를 자연에 되돌려주려는 의지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내가 수목장 숲을 도시 내부에 조성하고픈 이유가 또 하나 있다. 현재의 공동묘지는 붐비는 시즌이 한정적이다. 평소에는 적막하고, 명절에만 반짝 교통 정체를 겪는다. 줄줄이 늘어선 차량 행렬에 등 떠밀리듯이 와서 쫓기듯 행사를 치르고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현실적인 사정과 경위를 고려한다 치더라도, 사무적인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수목장 숲을 거닐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숲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숲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주차하고, 걷는 것이다. 도로도 사라지고, 건물도 사라진 작은 안식처에서 차분하게 고인을 떠올리며 걷는 산책. 나는 이것이 애도의 본질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명절마다 형식화된 절차를 수행하느라 벌어지는 각종 갈등을 떠올리면 더욱이.
공동묘지 숲은 생소한 아이디어 같지만 실상 모든 숲이 공동묘지다. 사슴벌레는 봉분을 쌓지 않고, 호랑이는 묘비를 세우지 않는다. 멧비둘기는 나무 둥지에서 태어나 나무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 숲에서는 죽음과 삶이 공존하며, 태어난 자리와 죽은 자리가 다르지 않다. 인간처럼 번다한 업적을 기념하고자 모두가 함께 쓰는 공간을 독점하는 행태는 없다. 가까운 숲에만 가봐도 죽어서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인간은 자연에서 난 동식물을 먹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생명을 지탱해준 지구와 생물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 겸손해져야 하지 않을까.
도시에서 사람들끼리만, 인공물에 둘러싸여 살다 보면 사람이 자연의 한 요소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공동묘지 숲이 도시와 자연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어주면 좋겠다. 숲의 크기는 작아도 괜찮다. 우리는 정원 테이블과 티타임 만으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종족이니, 아담한 숲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더구나 그 숲이 불필요한 흔적을 최소화하고자 자연으로 돌아간 이들의 안식처라면, 나는 그 사실에 더욱 감사하며 산책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