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705호 <학교 너머>
목을 많이 쓰는 직업이다 보니 물을 자주 마신다. 그런데 작년부터 코로나19 여파로 학교 공용 정수기 사용이 막혔다. 그간 텀블러를 들고 다니며 부지런히 떠다 마셨는데 이제는 덮개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학생들도 각자 집에서 물병을 챙겨 등교한다. 당연히 급식실에서도 식수 제공은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목이 마르면 쉬는 시간에 잠깐 마스크를 내려 물을 홀짝 마신다. 안쓰러운 풍경이다. 작은 입으로 한 모금, 한 모금을 아낀다.
물이 아쉬운 건 교사도 마찬가지다. 작년에는 학년 단위로 회비를 걷어 2L짜리 생수를 대량으로 들여왔다. 500mL 20개들이를 사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EBS 다큐멘터리 ‘인류세’를 인상 깊게 본 선생님 한 분이 강력추천하여 2L 6개들이로 최종 결정되었다. 1분도 걸리지 않은 협의였지만, 우리는 나중에 가서야 이 선택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회의실 구석에 고대 피라미드처럼 물통이 쌓였다. ‘이만하면, 1년은 거뜬하겠군.’하고 안심했다. 그러나 물 소비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교사 1인당 하루 평균 1L가량 물을 마셨다. 거의 6개들이 한 팩이 일주일 만에 동났다. 쓰레기도 굉장했다. 발로 밟아 공기를 빼고 뚜껑을 닫아도 부피가 꽤 되었다. 사람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관찰하고, 손으로 뒤처리를 하기 전에는 사태의 심각성을 잘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내가 물을 마시는 행위가 쓰레기 발생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매일 목격하면서 양심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500mL 페트병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렇게 1년이 지났고 새 학년이 시작된 요즘, 나는 결국 이동형 정수기를 구입하고 말았다. 정수기라고는 하지만 대단한 전자제품은 아니고, 주전자처럼 생겨서 필터 교환식으로 사용하는 무전력 정수기다. 다 쓴 필터는 모아두었다가 반납하면 업체에서 처리를 거쳐 재활용한다고 들었다.
학년에서 생수를 사자는 말이 나오기 전에 미리 냉큼 정수기를 구비한 이유는 “제 몫은 빼주세요.”라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적어도 1년에 생수 수십 통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다른 분들에게 내 취향을 강요할 마음이 없다. 편리함과 금전 절약 면에서는 생수가 정수기보다 유리하다.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생수 이용이 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내 몫만큼의 생수를 빼 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메시지 전달 방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간접적인 전달방식은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우리 반을 방문한 선생님 한 분이 정수기를 신기해하길래 취지를 말씀드렸더니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본인도 쓰레기 만들기 싫어서 물을 들고 다닌다면서,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기쁘다고 하였다. 우리는 연대감으로 똘똘 뭉친 게릴라들처럼 웃었다.
우리 반 학생들도 담임의 이상한 물건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수돗물을 넣었는데 어떻게 마실 수 있는 물이 되는지 몹시 놀라워한다. 나는 연금술사라도 된 양 세면대에서 수돗물을 거듭 퍼다 날랐다. 졸졸졸, 물줄기는 빈약했지만, 아이들의 눈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수업 재료로 써먹는다.
수업 재료가 된 담임의 이상한 물건
우리가 학교에서 공용정수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학계의 추정에 따르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박쥐의 몸에 존재하다가 몇몇 매개 동물을 거쳐 인간에게 옮아왔다. 최근 십수 년간 사스, 메르스 등의 동물 유래 바이러스에 인간이 쉽게 노출된 까닭 중 하나는 무분별한 개발과 자원 착취로 인한 야생동물 서식지 침범도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생수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중국과 미국을 돌아,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미세 플라스틱에 이른다. 종국에는 무한 소비 혹은 무한 성장이라는 목표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물음까지 나아갔다.
수업에 흠뻑 빠진 어떤 아이는 나랑 똑같은 정수기를 사겠다고 말했다. 어쩐지 정수기 영업사원이 되어 버린 것 같아 당혹스러웠지만, 아이의 마음에 공감하며 약속했다. 이 정수기도 금방 싫증 나서 버리면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그러니까 한 번 구매한 물건은 잘 관리해서 오래 쓰자고. 상으로 물 한 잔을 주고 싶었지만, 물을 공유해서는 안 된다는 방역 원칙에 따라 꾹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