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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Mar 24. 2024

엔도르핀 안 도는 위내시경

비수면 위내시경을 받았다. 수면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엔도르핀(엔돌핀)의 위력을 느껴보고 싶어서. 농담이 아니다. 나는 꽤 진지하게 엔도르핀을 느껴보고 싶었다. 비수면 위내시경과 엔도르핀이 무슨 상관관계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내 나름의 사정이 있다.


일명 티베트 승려 수술 사건. 대부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나도 어째서 티베트, 승려, 수술, 엔도르핀이라는 낯선 조합이 뇌리에 남아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책을 읽다 보면 왠지 모르게 강력한 기억으로 남는 정보가 있다. 책의 핵심이 아닌데도 어떤 문장이나 문단이 송두리째 내면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내게는 티베트 승려 엔도르핀 이야기가 그랬다. 도시전설에 가까운 기담이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미국 템파에서 명상 센터를 운영하던 티베트 출신 승려가 있었다. 승려는 건강이 나빠져 수술을 받게 된다. 극심한 고통이 동반되는 수술이라 마취가 필수였다. 그런데 승려는 무슨 까닭에서인지 마취를 극구 거부했다. 잠시 시간을 달라고 부탁한 승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깊은 집중으로 일종의 자기 암시 상태에 들어간 승려는 무사히 수술을 받았다. 의료행위를 방해하지도, 신음을 내며 힘겨워하지도 않았다. 의사들은 경악했다.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경지였기 때문이다. 승려의 신체를 조사하던 연구진은 마침내 뇌가 스스로 만들어 분비한 초강력 진통제를 발견한다. 이름하야 엔도르핀. 모르핀보다 훨씬 강력한 진통 효과에 부작용도 없었다.


티베트 승려 이야기를 읽을 당시 나는 종합 비타민을 끊던 중이었다. 활력이 부족한 것 같아서 비타민 B군이 강화된 제품을 복용했더니 위가 쓰라렸던 것이다. 이십 대만 해도 빈속에 홍삼진액고를 티스푼으로 떠먹고는 했다. 그런데 이제는 커피도, 비타민도, 홍삼도 식사 후에 먹어야만 괜찮았다.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신체도 섬세한 관리가 필요한 소모성 생물기관이라는 것을.


나는 템파의 승려를 만나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12살에 통도사 템플스테이를 5일 간 하면서 만났던 티베트 스님들을 떠올리면 소박하게 식사를 하고, 술이나 담배 약물을 멀리하는 사람일 것 같았다. 육식보다는 채식을 즐기는 수행자. 나는 티베트 승려가 강하고 멋져 보였다.


그래서 다짐했다. 참을 수 있는 고통은 어지간하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고. 내 비록 화타가 살을 째고 뼈를 갈아도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는 관우 운장은 아니지만 노력은 해 볼 수 있지 않은가. 최대한 덜 가공된 음식을 먹고, 계절의 변화를 거스르려 하지 않기. 여름은 약간 덥게, 겨울은 약간 춥게 사는 것이다.


최근 속쓰림 증상으로 내과를 방문했을 때 의사는 내게 위내시경을 권했다. 나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망설임 없이 비수면을 골랐다. 의연하게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카메라를 의식이 있는 채로 느껴보겠다고 다짐했다. 혹시 아는가, 티베트 승려처럼 늠름하게 엔도르핀을 발산하게 될 지도.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비수면 내시경에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 그 흔한 꺽꺽거림이나 발버둥 없이 3분 만에 끝냈다. 내시경 전에 목구멍에 뿌린 스프레이형 국소마취제의 영향이 크겠지만 정말로 힘들지 않았다. 마지막에 침을 좀 흘렸지만, 그뿐이었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건 호흡에 별 다른 문제가 없었다. 나는 기도의 존재를 피부로 느꼈다. 사람의 목구멍은 기도와 식도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경험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식도에 시커먼 전선과 카메라가 들어와 있는데도 숨이 쉬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기도가 다른 구멍이라는 것을 절실히 이해할 수 있다. 수면 내시경 이렇게 받기가 쉽지 않은데 정말 잘하시네요, 라고 의사 선생님이 칭찬을 했다. 긴장한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칭찬을 했다기보다는 '뭐 이런 환자가 다 있지. 특이하군.' 같은 감탄에 가까운 어조였다.


아쉽게도 엔도르핀은 직접적으로 체감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숭고한 기쁨이 차오를 줄 알았건만 싱겁게 끝났다. 이 정도 고통으로는 턱도 없는 걸까. 쌍둥이 자연 분만쯤은 해 줘야 자연스럽게 엔도르핀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남성이다. 쌍둥이는커녕 임신도 불가하다.


마지막 남은 방법은 출가하는 길 뿐이다. 우리 집에서 평창 월정사까지 영동고속도로로 가면 오십 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출가 사유에 '승려가 되어 수행을 쌓은 뒤, 수술실에서 마취를 하지 않는 파워풀한 엔도르핀 부처가 되고 싶음'이라 쓰면 어떻게 될까. 반려당하겠지. 아니, 틀림 없이 월정사 출입제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을까. 쓰면서도 어이없어 웃음이 나온다. 웃기만 해도 소량의 엔도르핀이 나온다고 하니 꼭 출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위적 기술과 약물에 의존하지 않는 현대인으로 살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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