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수 Mar 26. 2024

동네 철봉의 수수함

나는 철봉을 좋아한다. 동네 놀이터나 공원 산책로 한편에 무심히 한 두 개 서 있는 심플한 철봉. 오며 가며 심심할 때 턱걸이를 하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턱걸이를 아주 잘해서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내 기준에서 손등이 보이는 방향으로는 한 번에 열두세 개. 반대 방향으로는 조금 더 할 수 있다. 다만 묘기 같은 것은 일절 불가능하다. 딱 동네 산책인의 근력 유지용 수준.


철봉은 단순해서 좋다. 우선 기본적인 형태가 단정하다. 바닷가나 학교, 도심지 등 어느 곳에서나 위화감 없이 어울린다. 운동 방식도 쉽다. 별도의 준비물 없이 맨손으로 봉에 매달리면 된다. 그냥 가만히 매달려 있기만 해도 효과가 있다. 척추가 이완되며 편안해지는 기분. 매달리기는 스트레칭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철봉은 진입장벽이 낮다. 봉에 매달리고 싶은 사람은 그저 슬그머니 다가와 봉을 잡으면 된다. 퍼스널 트레이너도, 월회비도 없다. 나는 금요일 오전에 강문 해안 솔숲을 걷다가 머슬 비치에서 턱걸이를 했다. 가는 길에 열 개, 오는 길에 열한 개. 하얀 철봉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세인트존스 호텔 앞 머슬비치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강릉시와 호텔이 힘을 합쳐 조성하고 관리하는 듯하다. 나는 그 앞을 산책할 때면 꼭 철봉을 한다. 다른 분들도 여기서 턱걸이 한 개라도 좋으니, 혹은 십 초라도 철봉에 매달려 보셨으면 좋겠다. 파도가 부서지는 동해를 바라보며 몸을 위로 들어 올리는 쾌감은 상당하다. 눈을 감으면 바다의 웅장한 사운드가 잔잔하게 밀려든다. 그리고 숨을 쉴 때마다 짭조름한 바람이 콧구멍으로 들어온다. 소나무 향과 섞인 바다 내음은 싫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오묘한 느낌을 준다.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감각. 맨발로 백사장을 걷는 사람과 이른 봄의 추위도 아랑곳 않고 수영하는 사람이 한 풍경 안에 들어가 있다. 턱걸이를 하면 바닷가에 모인 사람들이 위아래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처럼 보인다. 모두들 자유롭게 살고 있다. 세상이 평일 낮의 동해 바닷가처럼 완벽한 밀도를 유지하며 느슨하게 돌아간다면 어떨까.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철봉에서 내려와 길을 걷다 뒤돌아보면 다른 사람이 턱걸이를 하고 있다. 매우 날씬한데 근력이 상당한 듯 팔을 넓게 벌렸는데도 수월히 상체를 들어 올린다. 턱걸이를 하는 사람들은 독특한 안테나 같은 것이 신체에 내장되어 있어서 저 멀리서도 철봉을 알아보는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턱걸이를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면 턱걸이 충동이 차 올라 한 세트라도 하고 간다. 턱걸이 운동의 파도타기 효과.


옛날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철봉 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요가센터도 헬스장도 드물던 시절이니 간단하게 몸을 단련하기에 철봉은 맞춤이었을 것이다. 철봉 하는 사람과 더불어 걸어 다니는 사람도 자주 눈에 띈다. 과거의 도로는 좁고, 자동차가 적었다. 지금처럼 편리한 이동수단이 지천에 깔려있지 않으니 사람들은 단단한 두 다리를 바지런히 움직이며 살았다.


지금보다 불편한 시대에 살았던 분들이 현대인보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더 건강해 보인다. 옛사람들이 활짝 웃으며 맨몸 운동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국이 GDP 수치를 올리는 동안 여러 가지 것들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이브리드 자동차도, 아이폰 프로도 없는 세상의 사람들은 무엇으로 행복하였던 걸까.


나는 1987년 생으로 풍요의 시대에 태어났으니, 추억 보정 효과가 작동한 것은 아닐 테다. 흑백 영상 속 철봉러들은 분명 내가 겪어보지 못한 시대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응답하라 1988'을 볼 때처럼 흐뭇해지는 이유는 뭘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얻었다.


아파트 게시판에는 거의 고정적으로 요가나 필라테스, 피트니스 센터 광고가 붙어 있다. 1년 회원권을 사시면 왕창 깎아드립니다, 대개 이런 식이다. 개중에는 주요 부위만 겨우 가린 트레이너의 바디프로필이 번쩍거리도 한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한 듯 턱살은 절묘하게 깎아지고 가슴 근육은 벌크업 된 사람들이다. 90년대 헬스장에 붙어 있던 리얼 근육맨들의 적나라한 필름 사진과는 다른 이미지다.


보정이 들어간 트레이너의 바디프로필에서 취미 운동인이나 생활 운동인의 자취는 찾아보기 힘들다. 운동은 프로페셔널의 영역이라고 강조하는 듯하다. 요란한 트레이닝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운동에 거리감이 생긴다. 몸을 가꾸기 위해서는 돈을 내고, 트레이너를 지도를 받아, 전문 기구로 관리받아야만 할 것 같다. 실제로 우리 동네에만 해도 전면이 유리로 된 PT 샵과 요가 센터가 성행하고 있다. 내가 오며 가며 슬쩍 본 가게만 해도 다섯 군데가 넘는다. 스피닝이나 복싱 등 기타 운동센터를 합하면 훨씬 많을 것이다.


부지런히 PT 받는 분들을 비난하고자 함은 결코 아니다. 꾸준히 운동하시는 것만으로도 진심 대단한 분들이라 생각한다. 나는 정직하게 몸을 써서 땀 흘리는 분들에 대한 존경심을 항상 품고 있다. 그것이 운동이든 노동의 영역이든 마찬가지다. 다만 운동이 생활 베이스에서 소박하고 성실한 형태로 진행되지 않고 상품화되는 점은 우려스럽다.


나는 언젠가 왜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북유럽과 캐나다를 위시한 복지 국가를 선망하는지 헤아려본 적이 있다. 내 결론은 이렇다. 나도 해 볼만하겠다,라는 감각 때문이 아닐까. 어디까지나 나의 느낌이긴 하지만, 내 모습 그대로도 나쁘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감각은 개인에게 꽤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태어났어도 혹은 평범한 집안에서 보통의 재능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나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을 지도. 이런 감정적 안정감은 사회적 쿠션으로 중요하지 않을까.


요사이 한국은 '올드 머니'에 열광하고 '신생아'를 찾아보기 드물다. 돈으로 기회와 성공과 행복을 다 살 수 있다고 믿는 허상 앞에서 미래는 어둡다. 인재 계발과 국가 경쟁력 차원 따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돈을 지불해야만 내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늘릴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거대한 기만이자 사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뇌의 도파민 시스템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작은 변화에도 만족과 행복을 늘리기 위해서는 불편함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운동, 명상, 독서, 글쓰기처럼 귀찮은 행위들을 묵묵히 수행하면서 멘탈을 관리해야 장기적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소비 프리미엄은 바닷물 같아서 마셔도 마셔도 갈증에 해소되지 않는다. 철저히 마케팅되고, 브랜딩 된 상품의 바다에서 얄팍한 일반인의 소비로 채워지는 만족은 얕다. 무한히 불만족과 갈망의 트레드밀을 타는 것이다. 덜컹덜컹 내 소중한 노동력과 시간, 한 줌의 자산을 아낌없이 갈아 넣으면서.


공원의 철봉은 내게 일종의 사물로 존재하는 선생님이다. 의지만 있다면 뚜벅뚜벅 두 발로 걸어와 내 체중을 이용하여 운동을 할 수 있다. 공공재로 관리되는 철봉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며 지치면 잠시 산책하면서 몸을 풀어도 좋다. 철봉의 운동 원리는 중력을 거슬러 근력을 키우는 것이다. 지구와 나, 과도한 보조 웨이트를 달지 않아 부상 위험도 적다. 턱걸이가 지겨우면 바닥에다 손바닥을 대고 팔 굽혀 펴기를 하면 된다. 이것 또한 지구와 나.


철봉 주위에서는 자동차 차 키를 꺼내어 비교할 일이 없고, 맞춤형 운동복을 갖춰 입을 필요도 없다. 생활 가운데서 힘을 주고 몸속 아드레날린을 뽑아내는 행위. 올드 철봉은 올드 머니보다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엔도르핀 안 도는 위내시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