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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Mar 29. 2024

주차장 라이프의 옐로카드

중환자가 병상에서 오래도록 몸을 뒤척이지 않으면 욕창이 생겨 살이 썩는다. 너무 이상했다. 욕창의 뜻을 처음 접한 어린 시절에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가만히 누워 있는다고 사람의 몸이 문드러질 수 있나. 죽은 것도 아니고 명백히 살아있잖아. 아홉 살의 나는 토요일에 열 시간씩 자도 전혀 살이 썩을 기미가 없었다. 자신의 경험을 판단의 절대적 근거로 삼는 어린이에게 노화와 생멸은 낯선 개념이었다. 욕창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다 나는 양양으로 출퇴근을 시작하면서 오랜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머리만 쓰면 병에 걸리게 된다는 사실을. 동해에서 강릉으로 이사를 왔다. 근무지도 삼척에서 양양으로 바뀌었다. 동해 집에서 삼척 학교까지는 차로 이십 분 남짓이었다. 그러나 강릉 집에서 양양 하조대 학교까지는 편도 사십 분이 걸렸다. 그것도 기회를 봐서 속도를 한껏 올려야 가능한 시간이었다.


메뚜기처럼 주차장과 주차장을 오가는 삶. 러시아워의 7번 국도는 출근 레이서들의 전쟁터였다. 먹고사는 문제가 달린 출근길에서 사람들은 본래의 드라이빙보다 세 배는 거칠게 차를 몰았다. 나를 포함해서 다들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양양이 관광지로 급부상하면서 공차 차량도 늘어났다. 호텔과 리조트를 짓기 위해 대형 덤프트럭과 크레인이 남북으로 내달렸다. 거대한 몸체가 움직이면 땅이 쿵쿵쿵. 대형 크레인이 지나가기에 일반 차선은 지나치게 좁았다. 무지막지한 덩치를 피해 나는 바깥 차선에 바짝 붙어 다녔다.


극히 한정된 시간대에 극히 한정된 도로는 무척 붐볐다. 강원도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교통체증이었다. 먹고사니즘의 전쟁터에서 매번 긴장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정체 구간에서도 내 발은 쉴 수 없었다. 2013년에 출고된 올란도는 올드카라 적응형 자율주행 같은 고급 기술을 구사하지 못한다. 차가 가고 서는 것은 오로지 운전수의 조작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그러니 발목이 시큰거리도록 엑셀과 브레이크를 왕복할 수밖에.


학교 주차장에 도착해 시동을 끄면 발바닥에서부터 뻐근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러나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쉴 수 없었다. 교실의 아침은 바빴다. 출석 확인과 아침 활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손발을 움직였다. 가정통신문을 수거하고, 공문함을 체크했다. 일처리가 효율적이지는 않았다. 우사인 볼트도 준비 운동 없이 100미터를 달리면 성적이 저조할 것이다. 운전만 잔뜩 하고, 충분히 걷지 못한 나의 뇌는 저효율로 작동했다. 만보기앱에는 겨우 오백 보가 찍혀있을 뿐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침에 부지런을 떨어서라도 운동량을 채웠어야 했다. 하루 걸음수가 삼천 보를 넘기지 못하는 날이 3주를 넘어갈 때 당장 루틴을 변경해야 했으나 내버려 두었다. 페이스 조절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좀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잡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흐리멍덩하게 서 있는 순간이 늘었다. 까닭 없이 불안하기도 했다. 내연기관 탈 것에 길들여진 나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저속 욕창증이라 불러도 무방한 그런 상태였다.


운동할 시간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다. 아홉 시 이후로는 시간이 났다. 아홉 시는 저녁을 먹고, 설거지와 분리수거를 하고, 아이들 공부를 봐주면 돌아오는 개인적인 시간의 시작점이다. 느긋하게 샤워를 해도 좋고, 독서를 해도 괜찮다. 베스트는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 돌면서 몸을 푸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단호히 게으름을 택했다. 이제 겨우 쉴 타이밍인데 또 나가라고? 솔직히 이런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제대로 쉰 것은 아니다. 반신욕을 하지도, 오일 마사지도 없었다. 우아하게 슈만 피아노 소나타를 듣지도 않았다. 주말에 읽다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다시 펼치지도 못했다. 나는 소파에 누워 웹소설을 무신경하게 읽었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나는 문장을 곱씹을수록 은은함이 배어 나오는 작품을 소화하기 힘들었다. 쉽고 즉각적인 도파민을 갈구했다. 


즐겨 읽은 작품은 <전지적 독자 시점>과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한국에서 보통인보다 힘겹게 살아가던 주인공이 이 세계에 던져져 본인만이 알고 있는 배타적인 고급 정보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다는 것. 구질구질했던 과거와 달리 먼치킨 주인공들은 신의 가호 혹은 동료의 힘으로 끝없이 강해져 마침내 세상을 구원하게 된다. 파죽지세, 아주 쾌감이 넘쳐흐르는 전개다. 회귀, 빙의물에 끌린다는 것은 무책임하게 꿀을 빨고 싶은 현실도피자의 면모다. 


나는 신들의 후원으로 능력치를 강화하고 싶었다. 체력에 십만 코인 투자. 신들의 후원이 없으면 세계 곳곳에 숨겨진 히든 피스를 발견하는 방법도 있었다. 학교 앞 석상을 부수고 정신력 레벨을 높이는 것이다. 오직 나만 알고 있는 정보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는 삶의 주인공. 그러나 꿈속에서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너무 지쳐서 꿈조차 꾸지 않았으니까. 


강릉과 양양 출퇴근 두 달째, 기어코 신호가 오고 말았다. 차에서 내리는데 쿵 하는 감각이 덮쳤다. 세상이 컴컴해졌다. 구름이 낀 것은 아니었다. 두개골 안에서 뇌가 출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차 보닛을 짚고 섰다. 후우 후우,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쓰러지는 건가, 식은땀이 흘렀다. 손에 힘을 콱 줬다. 천천히 숫자를 세며 호흡을 골랐다. 차츰 정신이 돌아왔다. 태양은 높게 떠서 노랗게 빛나는데, 출근한 나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건 명백한 옐로카드. 운명이 내게 보내는 경고장이었다. 걸어라! 걸어! 세찬 하조대의 바람이 내 심장을 두들기며 외쳤다.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희미한 징조는 이미 있었다. 주차장과 주차장을 오가는 생활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만약 오늘 아침의 경고마저 무시한다면 또 옐로카드가 날아올 것이 분명했다. 두 장의 옐로카드 누적, 레드카드.


살기 위하여 출퇴근 시간을 조정했다.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십 분 일찍 집을 나섰다. 그리고 십 분 늦게 퇴근했다. 앞뒤로 늘어난 십 분은 걸었다. 자동차를 학교 밖 공영 주차장에 대고 온 것이다. 광정천 근처 공영주차장은 평일 내내 한산했다. 양양 시골 학교에 근무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관광지에 직장이 있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었다. 학교로 가는 길에 멀리 하조대 바다, 가까이 광정천이 보였다. 갈매기가 날았고, 길 고양이가 어슬렁거렸다. 절로 마음이 느긋해지는 풍경이었다. 순조로운 하루의 시작이라는 말이 들어맞았다.


따지고 보면 걸음수로 천보도 되지 않는 거리다. 하지만 뇌는 나에게 마라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잠깐이라도 복잡한 생각을 멈추고 긴장을 풀기를 바랄 뿐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타박타박. 십 분 걷기는 확실히 기분 전화에 효과가 있었다. 컴퓨터 사용 중 블루스크린이 뜨면 리셋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관성의 법칙도 경험했다. 걷기의 즐거움을 맛보고 나니 조금만 더 걷고 싶어졌다. 그 마음은 밤 아홉 시까지도 지속되었다. 그래서 정말로 얼마 안 되는 나의 휴식 시간을 할애하여 걷고 뛰었다. 숨을 헐떡이며 돌아와 따듯한 물로 샤워. 완벽한 휴식이었다. 잠도 편안하게 푹 잤다. 


차에 의존하는 사람은 당장 편리할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아프게 된다. 땀 흘려 움직이는 사람은 당장 귀찮아도 결국에는 힘이 솟게 된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장거리 레이스에 올라탄 사람이다. 피곤하다고 장거리 대비를 안 하고 포기해 버리면 자꾸 더 인생이 어려워진다.


중환자실에서만 욕창으로 사람의 살이 썩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사람도 충분히 움직이지 않으면 몸이 서서히 녹슬어 끼기긱 소리를 낸다. 나는 자동차 수출국에 태어난 덕에 뛰어난 성능의 내연기관차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사고파는 것도 어렵지 않고, 수리 서비스도 잘 갖춰져 있다. 감사한 일이지만, 나는 운명의 옐로카드를 받으며 확실히 깨달았다. 스스로 바닥을 박차며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살 수 없다는 것을. 근육을 사용하지 않으면 편리한 엑셀레이터 페달조차 제대로 밟을 수 없게 되는 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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