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육에서 가장 기본은 3R이다. 읽고(Read), 쓰고(wRite), 셈하고(aRithmetic). 이중 읽고 셈하는 것은 학교에서 자주 한다. 모든 교과서와 지식 영역의 평가지가 읽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 또한 셈하기는 기초 연산의 차원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진다. 반면 쓰기 교육은 약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일기 쓰기가 기본이었던 과거와 교실과 달리 현재는 일기가 선택 활동화 되었다. 2005년 국가인권위가 초등학교에서 일기를 강제적으로 작성하게 하고 이를 검사, 평가하는 것은 아동의 사생활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고 판단한 사건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인권위의 권고는 '일기 쓰기를 하면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린이 인권을 지키며 글쓰기 교육을 하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일기 지도가 상당히 위축된 것은 사실이다. 일기가 글쓰기 지도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학생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기록하는 습관을 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성장의 측면에서 큰 손실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는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과 감정을 자신만의 언어로 인출하는 과정이다. 자료를 분석하고, 기억을 떠올리며, 때로는 냉정하게 평가를 하기도 한다. 두뇌를 다각도로 써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의 글을 좋아해서 기간 별로 괜찮았던 글을 게시판에 붙여둔다. 정말로 잘 쓴 글은 큰 소리로 읽고 서로 소감을 나누기도 한다. 글에는 말과는 또 다른 아이의 세계가 들어있다.
그렇지만 글쓰기 교육은 고되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상당한 인내심이 요구된다. 아이들은 모르는 단어를 계속 찾아보아야 하고, 맞춤법도 완벽하기 어렵다. 차라리 번호만 적으면 되는 객관식 시험이 쉽게 느껴질 정도다. 연필을 오래 쥐는 것도 힘겨워하는 아이들은 몸을 배배 꼰다.
"선생님, 우리가 동화 작가가 될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써야 돼요?"
여러 번 고쳐쓰기에 지친 아이가 참다못해 물었다. '공부는 왜 해요?' 만큼이나 난감한 질문이다. 나는 일단 너희가 동화 작가가 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나중에 어떤 일을 하든지 자기 이야기로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얼마 전에 우리 반이 참가한 생존수영 수업에서 겪은 웃긴 사건도 글로 남겨 책이 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책이요? 말도 안 돼요."
일기에나 쓸 법한 일이 무슨 책이냐는 반응. 나는 서가 구석에서 책 한 권을 꺼낸다. 2021년에 쓴 나의 첫 책 <선생님의 보글보글>이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뒹굴고 부대끼며 생긴 이야기를 묶은 책이다. 운 좋게도 '2021 상반기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로 선정되었고, 나중에는 오디오북과 큰 글씨책으로도 나왔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생존 수영 에피소드 중 한 대목을 읽는다.
"규훈이가 내게 물을 뿌리고 있다. 이건 상상이 아니다. 녀석은 너무나도 당당하다. 규훈이의 세 번째 시도는 내 팬티를 젖게 하는 데 성공한다. 지난주처럼 수영복을 입고 왔다면 녀석에게 물을 먹였겠지만, 오늘 나는 치노팬츠 차림이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이다."
수영장에서 내 팬티가 물에 젖는 장면은 언제나 아이들의 환호를 이끌어낸다. 어떤 교실에서든 실패하는 법이 없다. 매년 아이들은 생존 수영 수업을 받는다. 그리고 매번 옷이 축축해지는 사람이 나온다. 대한민국 학생이라면 모두 안다. 누군가를 웃기고 울리는 이야기는 돌고 돌아 책이 될 수도 있다.
"너희가 모두 전업 작가는 될 수 없겠지. 그렇지만 무슨 일을 하면서 살게 되든 글은 쓸 수 있어. 내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풀어내면 기분이 엄청 좋아. 생각 정리도 잘 되고."
단행본을 내본 경험은 때때로 매우 요긴하게 쓰인다. 아이들도 우리 선생님이 작가이므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교실 분위기가 슬슬 무르익으면 두 마디를 툭 던진다. 자기 이야기를 글자로 옮기는 연습은 빠를수록 좋다고. 너희는 이미 글쟁이의 기질을 보여주고 있다고.
예비 작가로 인정받은 어린이들은 신이 나서 글씨를 써 내려간다. 운동 경기에서든 쓰기 수업에서든 사기는 아주 중요하다.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누구도 말릴 수 없게 된다. 곰곰이 고심하며 문장을 채워나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담임의 마음은 촉촉해진다.
글쓰기는 초등학교에서 얻어갈 수 있는 강력한 인생 도구이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은 곧 사라진다. 반면 글자로 묶어둔 생각은 오래도록 남는다. 고운 체를 통과한 것처럼 엄선된 생각. 글씨를 쓰면 쓸수록 머리도 정교하게 작동한다.
최근 친환경 생활을 주제로 두 번째 책을 냈다. 고탄소 과소비 라이프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다. 이번 책은 사회 수업에서도, 도덕이나 창의적 체험활동 수업에서도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학생에게 글쓰기 교육을 시키려면 가르치는 사람도 글을 꾸준히 쓰는 편이 유리하다. 그럼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매우 공정하다는 생각을 한다. 글쓰기라는 어려운 숙제를 같이 떠맡고 있어서인가. 우리는 같이 고생하는 한 팀이라고 여기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