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사가 추천하는 일석삼조 가족 여가, '플로깅'
한 중학생이 호미로 땅을 파다가 지렁이를 손으로 만졌다. 축축하고 물컹한 감각에 그 남학생은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저 우스갯소리라고만 생각했다. 강원도에 살고 가끔 텃밭 농사를 짓는 나에게는 말도 안 되는 것처럼 여겨졌으니까. 어떻게 중학생씩이나 되어서 지네도 아니고 겨우 지렁이를 만졌다고 도망갈 수 있나.
그렇지만 지렁이 이야기를 들려준 '텃밭 선생님'은 꽤 진진한 얼굴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 사연은 진짜라는 의미였다. 선생님은 올해부터 서울 지역의 한 중학교에서 텃밭 수업을 맡게 되었다고 운을 뗐다. 평소 대도시 아이들의 생태맹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터라 수업 제안이 들어왔을 때 흔쾌히 수락하셨다고 한다.
생태맹은 자연을 충분히 접하지 못한 사람이 겪는 생태감수성 저하 상태를 뜻한다. 도시에 밀집해 살면서 흙을 만질 기회가 현저히 적어다 보니 자연과 교감하는 능력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산책 수업' 자주하는 이유
자연도 자주 봐야 그것에 귀하고 예쁜 줄 안다. 비포장 도로보다 아스팔트 포장이 된 검은 도로가 더 익숙한 아이들이 도시에는 흔하다. 나는 강원도 초등교사로 근무하며 시내 지역은 물론, 삼척 산골과 양양 바닷가 마을에서 아이들과 생활했다. 같은 시 단위 행정구역에 속해 있어도 시내 아파트 밀집지역에서 사는 학생과 자연경관이 수려한 농어촌 지역의 학생은 감성이 달랐다. 또 가정 분위기에 따라 캠핑이나 여행을 즐겨하는 경우에는 도심지 학생이라 할지라도 풍부한 생태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수학 사칙연산을 반복하면 익숙해지는 것처럼 생태감수성도 자꾸 자연에 노출되면 저절로 커지는 듯했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과 수시로 산책 수업을 가졌다. 벤치에 앉아 그림책도 읽고, 미술 시간에 쓸 조개껍데기와 나뭇가지도 주우면서 걸었다. 여름날 숲 그늘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참 좋았다. 그래서일까 학년 말 헤어질 무렵이면 '이제 산책 수업을 못해서 아쉽다'라는 소감이 들려왔다.
학교에서만 생태 수업을 하라는 법은 없다. 아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야외에서 개천에 발을 적시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가정에서도 의도적으로 생태교육을 하면 멋지지 않을까 하고 여러 번 생각했다. 모래사장과 오솔길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오면 관계도 좋아지고 기분도 나아진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아이들과 부모님들께 틈 날 때마다 '생태맹 탈출' 활동을 소개했다. 바로 플로깅이다. 사실 가족 텃밭 가꾸기도 좋고, 캠핑도 멋지지만 모두가 즐기기에는 무리가 있다. 토마토와 상추라도 기르려면 땅이 필요하다. 친척이나 가족, 지인이 땅이 있으면 상관없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는 분들에게는 섣불리 권할 수 없다. 캠핑도 비슷하다. 각종 장비와 짐을 싣을 커다란 차량이 필요하다.
반면 플로깅은 매우 간단하다. 가족끼리 종량제 쓰레기봉투 하나를 들고 장갑 혹은 집게를 이용해 쓰레기를 주으면 된다. 나는 가급적 플로깅의 즐거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풍경이 멋진 장소를 권해 드린다. 강릉과 양양 일대에는 해변과 호수를 비롯해 산책하기에 근사한 장소가 즐비하다. 양양 남대천, 하조대와 인구 해변, 경포호나 순포 습지 등등.
내가 추구하는 플로깅은 가족끼리 산책을 하면서 계절 변화의 풍요로움도 누리고 환경 정화활동을 하는 것이다. 단체에서 캠페인을 벌이는 것도 아니기에 급할 것이 하나도 없다. 왜가리도 구경하고, 꽃 향기도 맡으면서 슬슬 놀듯 집게질을 하면 된다. 서로 어디에 쓰레기가 있는지 알려주며 정답게 페트병을 줍다 보면 웃을 일이 늘어난다. 평소보다 대화도 자주 하게 된다. 왠지 착한 일을 하는 것 같아 뿌듯함도 있다. 칭찬을 들으러 가는 건 아니지만 꼭 좋은 말씀을 해 주시는 주변 분들이 등장하신다. 특히 연세가 있는 분들은 격려와 덕담을 빼놓지 않는다.
내가 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만 플로깅을 권할 수는 없다. 나 또한 아내와 더불어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까지 총출동해 종종 쓰레기를 줍는다. 플로깅 장소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바뀐다. 산책을 하다가 쓰레기가 많이 눈에 띄는 곳이 있으면 기억했다가 우선적으로 줍기도 한다.
이번에는 2년 만에 강릉 주문진에 있는 향호 쓰레기를 주웠다. 향호는 강릉의 경포호나 속초의 영랑호, 청초호와 달리 한적하다. 관광지화가 덜 되었다고 할까. 자전거 대여 시설이나 간식을 파는 가게도 없다. 대신 공중화장실과 운동기구 그리고 산책길이 단정하게 조성되어 있다. 짧은 데크와 벤치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지역민을 위한 여가장소로는 부족함이 없다.
나는 인파가 북적이는 곳에서 플로깅을 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두 아이를 챙기느라 더 신경을 써야 하고, 한적한 심정으로 쓰레기를 주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느린 산책의 일환으로 플로깅을 한다. 정신 사납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싶지 않다. 또 괜히 집게와 쓰레기봉투로 주목을 받는 것이 불편하다. 그런 관점에서 향호 같은 곳은 언제나 편안하게 플로깅을 할 수 있다.
운 좋으면 네잎클로버 군락지도 발견합니다
운이 좋게도 휴지를 줍다가 우연히 네잎클로버 군락지를 발견했다. 네잎클로버는 보통 하나만 있지 않고 주변에 뭉쳐서 자란다. 우리는 잠깐 집게질을 멈추고 아이들과 네잎클로버를 찾으며 놀았다. 그러다 풀밭 옆을 기어 다니는 개미를 구경하느라 한참을 보냈다. 생태감수성이 별것 있나. 그때그때 주변 자연물을 들여다보고 만지고 하는 것이지.
가족 플로깅은 순위가 매겨지는 대회가 아니다. 운동한다는 마음으로 발길이 가는 대로 주워도 상관없다. 우리 가족은 새 구경을 좋아해서 물가를 주로 돈다. 가마우지가 젖은 날개를 말리고, 물총새가 호수의 보석처럼 날아가는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아무 근심이 없어진다. 역시 플로깅 중간에 하는 '새멍'이 최고다.
20리터 봉투를 채운 후 아이들과 수동 킥보드를 타고 달렸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이라 바람, 온도가 적당했다. 호수 입구에 강릉 북부권 개발로 향호를 차차 국가정원으로 끌어올리겠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지역 발전과 휴식 기반기설 확충이라는 점에서는 반길 일이겠지만, 나는 지금의 향호도 참 정겹다. 옷차림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주차장이 널널한 향호가 좋다.
요즘 동해안은 조금 분위기가 산뜻하다 싶으면 죄다 개발 일색이다. 침착하고 수수한 해안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 '생태맹'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뭐든지 대규모 자본을 투입해 손을 대야만 편하고 좋다는 발상은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어쩌면 한국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같기도 하다.
플로깅을 마친 우리 가족은 점심밥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공깃밥을 싹싹 긁어 비웠다. 몸을 움직인 후에 먹는 식사는 대체로 꿀맛이다. 한참 날씨가 좋은 계절이니 가족과 연인과 함께 쓰레기를 주워보는 건 어떨까. 플로깅에는 키즈카페나 미술관과는 또 다른 기쁨이 있다. 우리 아이의 생태맹이 우려된다면 더더욱 해 볼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