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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속노화는 렌틸콩을 먹는 것? 잠부터 잘 자야 한다

<저속노화 마인드셋> 정희원 지음, 웨일북

by 이준수


ⓒ웨일북


우리 부부는 아이돌 덕질을 하지 않지만, 어떤 의사 선생님 덕질은 한다. 저속노화좌로 알려진 정희원 노년내과 의사다. 2023년 1월 겨울, 정희원 선생님의 책인 <당신도 느리게 나이들 수 있습니다>를 읽고 소리를 칠 뻔했다.


"그렇죠, 바로 이거죠! 제가 꼭 듣고 싶었던 말입니다!"


우리는 고작 삼십 대 중후반의 부부이지만 스스로를 학대하지 않는 라이프스타일에 크게 공감했다. 저속노화는 사실 미끼 같은 말이다. 정희원 선생님이 추천하는 대로 살면 결과적으로 천천히 늙을 수 있다. 그렇지만 저속노화라는 단어를 풀어보면 몸에 부담을 주지 않는 건강하고 여유로운 생활에 가까웠다(우리가 체감하기에는).


만성적인 피로를 달고 살았던 우리는 책 속의 느릿한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완이 되었다. 이후로도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 <저속노화 식사법> 등의 후속작을 사서 읽으며 정희원 덕질을 계속했다. 이번 신간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출간 즉시 주문했다.


저속노화 마인드셋! 전작과 제목은 유사하지만, 좋은 내용은 다다익선(아내는 이번 책이 전혀 다른 결이라고 주장했다) 아닌가. 배송된 책을 받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과연 아내의 말이 맞았다. 세간에서 오해되고, 남용되는 '저속노화 라이프'를 바로잡기 위해 낸 책이었다.


‘저속노화’라는 말의 진짜 의미


가령 가장 대표적인 오류가 '렌틸콩 전도사' 같은 이미지다. 오해를 풀어보자. 저자는 흰쌀밥보다 잡곡밥을 추천한다. 정제 탄수화물인 흰쌀밥만 먹으면 혈당이 급격히 상승하기 쉽다. 또 노년기에는 장기능 저하가 흔하므로 식이섬유가 풍부하며, 단백질과 각종 영양소가 풍부한 잡곡밥을 권하는 것이다. 당연히 잡곡밥의 구성 및 비율은 개인의 상태나 기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지만 TV 방송이나 인터뷰에서는 자극적이고 단순한 콘텐츠를 선호하기 마련! 그 탓에 예시로 언급한 '렌틸콩 잡곡밥'이 정희원 교수의 필수 아이템처럼 부각된 것이다. 『저속노화 마인드셋』에서는 모든 종류의 집착을 경계하라고 강조한다. 저자가 렌틸콩을 먹고, 러닝을 하고, 호른을 연주한다고 해서 모든 독자가 이름도 낯선 호른을 불 필요는 없다. 러닝 대신 등산을 하거나, 호른 대신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도 무방하다.


정희원 교수의 유튜브에서 다양한 잡곡 관련 오해와 진실을 다룬다. ⓒ정희원의 저속노화 유튜브


누구나 가능한 실천법 하나: 수면


저속노화의 핵심은 중용과 지속적인 실천이다. 정희원 선생님은 자주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돌볼 '가처분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일은 줄이고 그 시간에 운동을 하고 현재에 집중하기 위한 '명상'이나 '악기연주'를 하라니 참 좋은 인생이다. 나는 이 말에 깊이 동의하지만 사정에 따라 실천이 어려울 수 있다. "그걸 누가 몰라? 퇴근하면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매번 잡곡밥을 해 먹나?" 같은 반발심이 들 수도 있다는 의미다.


『저속노화 마인드셋』 중에서 딱 하나 만이라도 해보길 추천하는 방법이 있다. 일단, 잠부터 여덟 시간 푹 자기. 충분한 잠은 저속노화의 뿌리에 해당한다. 정희원 선생님의 처방에 따르면 숙면에만 성공해도 저속노화 라이프 스타일의 절반은 저절로 갖춰진다. 무슨 말인고 하니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 스트레스가 줄고 문제 해결력이 상승하여 깨어 있는 동안에 최고의 효율로 효과적인 일상을 보낼 수 있다. 그야말로 꿀잠 자고 갓생을 살자!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잠을 못 자면 악순환의 연속이다. 아무 이유 없이 짜증이 나고, 머리도 안 돌아간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맵고 짜고 튀긴 음식을 찾아 과식한다. 그럼 또 몸에 과부하가 걸린다. 잠을 못 잤으니 운동할 체력도 남아 있지 않다. 체형이 망가지고 속도 불편하니 거울을 봐도 영 기분이 별로다. 그러니까 속는 셈 치고 나도 일찍 자볼까? 그런 마음으로 조기 취침(열 시 반이 조기취침이라니!)에 도전했다.


수면 루틴 바꾸기, 현실 도전기


평소 나의 취침 시간은 열 두시, 자정 직전이었다. 아침 기상 알람이 여섯 시 사십 분에 맞춰져 있으므로 일곱 시간 조금 안 되게 잠을 잔 셈이다. 아주 부족한 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넉넉하다고 볼 수도 없는 수면. 기상할 때 뻐근한 감각은 있었다. 그래도 문제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초등학생 아이 둘 키우며 맞벌이하는 집이 다 그렇지. 어떻게 여덟 시간을 꽉꽉 채워 자, 그런 면죄부 논리가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나의 일상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침 여덟 시에 집을 나서 오후 여섯 시에 퇴근한다.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설거지와 빨래를 비롯한 집안일을 한다. 아내와 아이들 숙제도 봐준다. 아홉 시 반쯤 대충 정리가 되면 삼 십분 정도 가볍게 동네를 산책한다. 열 시 넘어 샤워를 하고 웹툰을 보거나 영화, 스포츠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며 긴장을 푼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시곗바늘이 숫자 12를 가리켰다.


여덟 시간 수면을 위해서는 취침 시각을 당기는 수밖에 없었다. 출근은 고정되어 있으니 무조건 빨리 자야 하는 것이다.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정신과 시간의 방'처럼 시간을 늘리거나 줄여 쓸 수도 없다. 오후 커피 양부터 줄였다. 그간 멀쩡한 상태로 일과를 처리하기 위해 카페인의 힘에 의존했다. 드립커피 기준 오전 한 잔, 오후 한 잔. 둘 중 하나라도 건너뛰면 고통스러웠다.


열두 시 수면에 맞춰진 오후 커피 양을 절반으로 줄이고 커피 타임도 네 시에서 세 시로 당겼다. 수 년째 맞춰져 있던 생체 시계가 쉽게 바뀔 리가 있나. 자꾸 눈꺼풀이 내려왔다. 내 등에 매달려 있는 곰 모양의 피로 덩어리가 두 배는 커진 듯했다. 정희원 선생님이 이래서 수면 주기 조절이 힘들다고 하셨구나. 기운이 달리니 단 음식이 그리웠다. 『저속노화 마인드셋』에서 우려를 표하는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쟁여두고 수시로 퍼먹었다. 나중에는 건강을 위해 아이스크림을 수박으로 바꿨다.


열흘 간 반복된 커피 절제의 효과는 강력했다. 자기 전 스트레칭과 팔굽혀펴기까지 한 세트 하자, 젖산이 생성되어 금방 곯아떨어졌다. 도저히 넷플릭스에서 <오징어 게임>을 볼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눈 감으면 그대로 꿈나라. 익숙한 알람 소리에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잠을 자지 않고 17-19시간 깨어 있으면 혈중 알코올 농도(BAC) 0.05%와 유사한 수준의 인지 반응 속도 저하가 발생한다. ⓒ정희원의 저속노화 유튜브


숙면 열흘 실천 후의 변화


여덟 시간 수면은 감히 '회춘'이라 칭할만했다. 저속노화의 핵심은 영양제나 헬스장이 아니었다. 기본 중의 기본은 수면. 푹 잔 날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쾌적함이 지속되었다. 가만히 떠올려 보면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지쳐있지 않았다. 야구 배트와 글러브를 들고 쏘다녔으며, 놀 거리라면 뭐든지 뛰어들었다. 낮잠 자는 어른을 이해할 수 없었고, 해가 지면 잤다. 단순하고 활력 있는 삶. 따지고 보면 원리는 간단하다. 커피나 술을 마시지 않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매일 실컷 자기.


『저속노화 마인드셋』과 함께 읽어보면 좋을 최신 연구 결과를 찾아보았다. 스웨덴 웁살라대학교 의대 연구팀이 2025년 Biomarker Research에 기고한 논문이 인상적이었다. 단 3일의 수면 부족만으로도 젊고 건강한 남성이 심혈관 위험과 관련된 단백질 수치가 높아질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수면 부족이 길게 이어지면 위험하다고 알고 있지만, 며칠 잠을 설치는 정도는 괜찮다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미국심장학회(AHA)도 건강 관리 지침인 'Life's Essential 8'에 '수면의 질과 양'을 포함시켰다. 심지어 연령대 별 권장 수면시간도 제시하는데 성인의 경우 매일 7-9시간이다. 6세에서 12세의 어린이는 9시간에서 12시간까지 자야 한다고 나와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는 한국인이 보기에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긴 수면이다. 그럼에도 삶의 안녕을 위해서는 8시간 이상의 수면이 표준인 것이다. 한국인의 짧은 수면이 혹사에 해당하는 것이고.


어릴 때의 건강한 식습관, 생활습관은 단순 비만 예방을 넘어 올바른 성장에도 영향을 끼친다. ⓒ정희원의 저속노화 유튜브


잘 자는 삶이 곧 잘 사는 삶


『저속노화 마인드셋』은 나아가 현대의 아이들이 이미 가속노화의 궤도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장과 노화가 거의 같은 기전을 공유한다는 지식이 필요하다. 정희원 선생님은 인슐린-IGF1 경로와 mTOR를 예시로 들어 설명한다. 현대의 어린이는 불규칙하고 불량한 식사를 하고, 과도한 학습량에 수면의 양과 질도 좋지 않아 가속노화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 주장의 골자다. 가속노화는 성조숙증과 소아비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책을 읽다 보면 정의원 선생님이 아산병원 노년기 내과 교수직을 그만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메이저 병원의 안정적인 의사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이유는 『저속노화 마인드셋』에서 강조하는 균형 잡힌 삶을 위해서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리고, 나를 돌볼 수 있는 빈틈을 만드는 것. 과연 정희원 선생님 답다는 생각을 했다.


보다 자유로워진 선생님이 즐겁게 러닝하고, 호른 불면서 간간이 책을 써 주셨으면 좋겠다. 서둘러 집필하느라 가속노화하면 곤란하니 몇 년에 한 권씩 여유있게 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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