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이 곤란한 아주 사소한 이유
요즘 아내가 수상하다. 그녀는 주변 물건을 정리하고 있다. 거실 한편에 놓여있던 장 스탠드가 사라졌다. 재작년 결혼을 앞두고 분위기 내려 산 인테리어 소품이었다. 다음 날엔 책장 한 칸이 통째로 비어있다. 무지개 원리, 트와일라잇, 시크릿.. 족히 스무 권이 넘는 책들은 아내가 대학 다닐 때 사 모은 도서들이었다. 또 욕실 치약이 떨어져 베란다 창고에 가지러 가니, 늘 기대 있던 커다란 스테인리스 양푼이 없었다. 장모님이 김장용으로 사다주신 혼수였다.
'오랫동안 여행할 것처럼 정리정돈을 하면 자살징후입니다.'
학교폭력 연수 강사의 말이 퍼뜩 스쳐간다. 아내가 육아에 지쳐 우울증에 걸린 걸까? 내가 지난주에 회식이 많긴 했다. 혼자 아기를 보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불안한 기분에 안방 문을 열었더니 젖먹이고 난 아내가 연우 옆에 나란히 누워있다. 곤히 자는 아내를 깨울 수 없었다. 정말 내가 모르는 무슨 변화가 있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자기야, 일어나 봐. 우리 데스크톱 팔아버릴까? 노트북 밖에 안 쓰잖아."
아침 눈 뜨자마자 아내는 데스크톱 컴퓨터를 팔아버리자고 했다. 어젯밤 고민이 떠올라, 얼른 정신 차리고 아내에게 물었다.
"왜 자꾸 뭘 없애는 거야?"
"나 이제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로 살 거야.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해방되기!"
슈퍼맨 동작으로 오른팔을 쭉 뻗는다. 깔깔거리는 웃음에서 레몬향이 났다. 다행이다. 걱정한 만큼 이상한 문제가 아니다. 하긴 최근 배송된 책들 제목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심플하게 산다, 집의 즐거움, 멋진롬의 심플한 살림법, 이너프' 긴장이 풀어지니 궁금해졌다. 미니멀리스트로 사는 건 어떻게 사는 걸까? 도서를 훑어보는데 아내가 대뜸 던진다.
"오빠, 파이트 클럽 대사 기억나? 그 브래드 피트가 하는 말."
"몰라. 대사가 한두 개 여야지."
"너는 결국 네가 가진 물건에 소유당하고 말 거야 -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 역)"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설명하는 바를 찬찬히 들어보니 우리가 물건을 사고, 유지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투자한다는 게 요지였다. 당장 우리 집만 하더라도 다 읽지도 못한 여러 책들이 책장에 꽂혀있고, 냉장고에 식재료가 충분한데 습관적으로 이마트에 간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조립하자고 사놓은 레고 '눈 덮인 마을 축제(품번 10235)'는 박스도 안 뜯었다. 샤워도 매일 안 하는 주제에 비누와 면봉은 목욕탕 주인처럼 구비해 두었다. 구석구석 따지고 보니 상황이 심각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물건을 소유 있었으며, 다른 무엇을 채우려 애썼다. 물건에 대한 애정보다 쇼핑하고, 카드 긁고, 배송 기다리는 짜릿함에 중독되어 있었다. 정작 물건을 손에 쥐면 급 흥미가 떨어져 집안 어딘가에 박아두기 일쑤였다. 가치를 돋보이게 하려고 구입한 물건이 도리어 삶을 지배하는 그림이었다.
최다혜 전도사의 복음에 따라 미니멀리즘교에 귀의하기로 하였다. 심플하게 사는 인생은 별 거 없었다. 내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추려내고, 소중한 것을 위해 물건을 줄이고 시간을 관리하면 된다. 처음에는 1년 이상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부터 정리했다. 격자무늬 벨트, 교생 실습용 양복, 방한화, 알토 리코더, CK ONE 향수...
'다 필요한 때가 온다던데.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는데, 버리기 아깝다.'
이런 착각으로 3년 이상 된 짐들이 상당했다. 모두 의류 수거함과 쓰레기 종량제 봉투로 직행했다. 예전에 기고한 글이 실린 잡지, 신문도 재활용 수거함에 버렸다. 워드 프로세서 형태 파일 보관만으로 족했다. 혹시 모를 둘째를 위해 남겨두었던 젖병, 모빌, 공갈 젖꼭지도 과감히 처분했다. 주로 우리 부부는 네이버 카페인 ' 동해맘의중고나라'를 이용하여 드림(무료로 나누어 줌)과 땡처리를 했다. 집이 자꾸 넓어졌다.
공간을 넓게 쓰니 한결 느긋해졌다. 비어있는 공간은 상당히 중요하다. 비어있기 때문에 다용도로 쓰인다. 놀라운 반전이다. 무용지용(無用之用)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컵이 비어있어 쓰임이 발생하듯 공간도 그랬다. 연우도 거실을 자유롭게 기어 다닌다. 엎드려서 책을 봐도 된다. 같은 집인데 전혀 다른 집 같다. 심플 라이프, 막상 시작해보니 정말 상쾌하다.
꼭 경제적인 영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행복한 삶을 누리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를 없애는 데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스마트폰 중독자다. 수시로 SNS와 메일함을 확인하고, 가십 거리를 읽는다. 혹시 뭔가 건질만한 콘텐츠가 없나 하는 기대감을 품고 있다. 만일 양질의 텍스트를 즐기고 싶은 거라면 책을 읽으면 된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스마트폰을 놓지 못한다. 여가 시간 없다고 툴툴거리면서, 쓸데없이 전전긍긍하며 스마트폰에 귀중한 정력을 허비했다.
가끔 스마트폰 전원을 끄기로 했다. 디지털 기기로부터 멀어지니 확실히 아내와 얘기하고, 연우와 노는 시간이 늘었다. 눈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군더더기를 버리고 나면 얻는 것이 매우 많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 상황을 유지하려는 습성이 있기에 당장 실천하기에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다만 나는 비워내기를 실천하고, 진심으로 흡족스러웠다. 벌여놓은 일을 감당하지 못해 이거 찔끔, 저거 찔끔하며 사는 것보다 훨씬 담백하고 단단한 일상을 선물 받았다.
직장에서도 미니멀리스트로 살고 싶은데, 그놈의 '승진'이 늘 골칫거리였다. 멀티태스킹이 안 되는 나 같은 인간에게 승진제도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연구학교, 학폭, 영재, 개인 연구, 윗사람과의 술자리, 남자 모임, 벽지, 농어촌, 인맥 쌓기...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고 살아간단 말인가? 백화점식 승진 점수를 채우려면 교사로서의 삶은 팍팍하고 황폐해졌다.
잔가지는 쳐내고,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남교사는 당연히 승진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남들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해보지 않고서 잘 구분하던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자기이해도와 미래 예측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20대 남선생은, 막연히 빨리 승진하고 싶어 진학한 대학원에서 한계를 맛보았다. 대학원 진학 결심은 군대 경험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인제 703 특공연대에서 작전병(상황병이라고도 한다. 보통 군인 간부들의 일과를 돕고, 커피 타고 잔업 처리하는 시다(?) 노릇을 한다.)으로 군생활을 했다. 철저한 계급 사회에서 간부들의 노예로 침묵과 굴종의 역사를 썼다. 개구리 전역모를 쓰고 위병소를 나오던 날 다짐했다. 억울하면 출세해야겠구나. 교장 교감되는 게 출세도 아닌데 병적으로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복직하자마자 교원대 교육행정과에 진학하기 위해 관련 원서를 찾아 읽었다. 예나 지금이나 우둔한 건 매 한가지라 교육행정 전공하면 막연히 잘 풀릴 거라 믿었다.
강내면 다락리 청람벌에서 행정 공부를 하면 할수록 승진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 복잡하게 이것저것 챙길 거 많은 현재의 승진제도는, 나 따위 인간이 온갖 정성과 시간을 들여 매달릴 성격의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현재 4학기까지 다녀놓고 무기한 휴학 중인데, 적어도 나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돌아볼 수 있었으니 등록금 낸 보람은 있었다. 승진 신경 쓰느라 우왕좌왕 하지 않고, 본질에 집중하며 살기로 했다.
번잡하던 마음을 다잡고 나서 교직 생활 패턴이 꽤 바뀌었다. 우선, 어지간히 중한 자리가 아니면 친목도모 형식의 체육연수(라고 쓰고 배구, 배드민턴이라 읽는다.),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회식을 빙자한 저녁 술자리를 최소화했다. 그럼 그 시간에 뭘 하느냐? 그냥 집에 온다. 연우 목욕시키고, 이유식을 먹인다. 행운으로 연우가 일찍 자면 영화보거나, 게임하거나, 글쓴다. 겨우 그게 뭐냐고 할 수 있지만 정말 큰 변화다. 몹시 행복하다. 단순하게 사니까 스트레스가 덜하다.
또 아이들과 함께 하는 학급살이가 단촐하여졌다. 예전에는 페이스북이나 인디스쿨에서 좀 반응 있다 싶은 자료를 죄다 교실에 가져왔다. 대부분 양질의 자료였지만, 교사의 교육철학이나 아이들 성향에 맞지 않는 것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담임이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좋은 글 읽고, 깊게 생각하고, 기록하기. 고전적이지만 효과는 강력하다.
우리 반 아이들과 매주 그림책 한 권을 정하여 읽는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문답하며, 서로의 느낌과 의견을 교류한다. 월, 수요일에는 일기를 쓰고, 주중 하루는 간단한 한글 맞춤법을 익히고 예문을 작성한다.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동네 문제를 고민하고 사람들 취재도 하면서, 나름의 해결방안을 마련한다.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에는 도서관하고 친해지라고 책놀이를 한다. 책으로 볼링을 하고, 주인공 이름 빙고게임도 한다. 그 밖에 잡다한 행위들을 한다.
이런 짓거리는 승진하고 별 연관은 없지만 재밌다. 공허하지 않고 충만하다. 대단치 않지만 만족스럽다. 이 정도면 꽤 괜찮지 않은가? 누가 '사람이 태어났으면 큰 뜻을 품어야지'라고 다그친다면 미니멀리스트라고 핑계를 대면된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쭉 이렇게 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