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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넘어 다시 쓰는, 나를 위한 일기

The-K 매거진 2019년 1월호 <essay>

by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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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시는 10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구나.’


남들은 멋모르는 10대가 제일 행복한 때라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고향 떠나 혈혈단신으로 대학 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전혀 슬프지 않았다. 내게 학교란 긴장되고 혼란스러운 곳이었다. 그저 의무로 다니는 우악스러운 정글을 빨리 졸업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다만 유일한 탈출구가 있었으니, 바로 일기였다.

일기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선생님께 확인받는 일기장으로 혼나지 않을 수준의 내용을 적당한 분량으로 제출했다. 대신 솔직한 생각을 담은 진짜 일기는 이면지 같은 데다가 마구 갈겨 쓴 다음 구겨버렸다. 구겨진 종이에는 친구를 욕하거나, 짝사랑하는 여자애와의 가상 로맨스 따위가 적혀있었는데 쓰고 나면 속이 후련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누가 볼까 봐 후미진 하수구 구멍이나 소각용 쓰레기봉투 안에 속마음 읽기를 쑤셔 넣었다. 겉보기엔 순하고 말 잘 듣는 학생이었지만, 속으론 유황불을 품고 살았던 소년은 쓰는 행위로 10대를 버텼다.


글은 내 삶의 구원자였으며, 삶의 만족도를 가리키는 지표였다. 글을 많이 쓰면 쓸수록 힘들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선생님이 되고,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며 글을 잠시 잊고 지냈다. 무언가를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좋은 날들이었다. 새로이 글 쓸 욕구가 솟은 건 교직 칠 년 차, 서른 무렵이었다.


“수업도 재미없고, 아이들 미운 짓 하면 의욕 떨어지고, 학부모까지 드세게 나오네... 요즘 영 학교 갈 맛이 안 나.”

“너 그거 매너리즘이야. 까딱하면 오래 간다.”


매너리즘, 선배에게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울적한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주말이면 월요일이 두려웠고, 하교하는 애들 뒤통수가 가장 예뻐 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매너리즘이 확실했다. 인지적 혼란이 찾아왔다. 그 누구보다 교직이 잘 맞는다고 믿었던 나였다. 겨우 7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타성에 젖어 무기력해진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정신을 추슬러 학교에 정을 붙이려 해도 좀처럼 증상이 나아지지 않았다. 돌연 사직서를 내고 교사를 그만두었다는 어느 선생님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내가 왜 이럴까. 그토록 교실을 좋아했으면서 인제 와서 이러면 어떡해. 넌 딸까지 있는 아빠라고. 사표 낼 수도 없고 도망칠 데도 없어.>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아이들 수학 수행평가지를 매기다 말고 시험지 여백에다 떠오르는 문장을 쓰고 있었다.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나오는 습관, 쓰기였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옛 친구를 만난 듯 기쁘고 설렜다. 누가 어깨를 두드려 준 것도, 안아준 것도 아닌데 뒤죽박죽 엉켜있던 마음이 풀어졌다. 그날부터 일기를 썼다.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가감 없이 문자를 입력했다. 천국이 가까이 있었다.


며칠 간은 내 기분만 썼다. 그러다 자연스레 학급 아이들 얘기를 함께 쓰게 되었다. 하루에 하나씩 눈에 띄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고 퇴근 후 글로 옮겼다. 말썽 피우며 담임 속을 뒤집는 녀석들도 곰곰이 뜯어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일기를 쓰다 말고 키득키득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어느새 출근길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신규 교사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선생님, 내년에도 저희 반 해주세요.”


2학기 마무리를 앞두고 담임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여럿 받았다. 나는 일기를 썼을 뿐인데, 아이들과 더 친해졌고 표정이 밝아졌다는 소리를 주위에서 들었다. 일기는 권태로움의 수렁에서 나를 건져냈다. 누군가에게는 춤이, 노래가, 그림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처음 시작하던 무렵의 두근거림을 되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잊고 지냈던 소중한 무언가가 마음의 문을 톡톡 두드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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