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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판 사정은 들어 봐야 아는 법

by 이준수

4교시가 끝나면 초등학교 생활의 꽃, 급식 시간이 시작된다. 스물한 명이 나란히 앉은 단체 식탁에서는 예측불가한 일들이 벌어진다. 다 큰 것처럼 보이는 6학년도 편식을 한다. 편식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야채 편식이 압도적이다. 특히 오이와 가지는 편식계의 스타이다. 오이파는 오이 특유의 향에 눈을 찡그리고, 가지파는 물컹거리는 식감에 넌더리를 낸다.


우리 반은 잔반 남기지 않기 규칙이 있다. 한동안 편식을 하던 녀석들이 언젠가부터 오이파와 가지파 모두 식판을 깨끗이 비워서 검사를 받았다. '철들었구나', 나는 그냥 애들이 꾹 참고 먹은 줄로만 알고 지냈다. 그러다 우연히 오이파와 가지파의 음식 거래 장면을 보았다. 오이파에게는 가지가, 가지파에게는 오이가 용납 가능한 음식이었나 보다. 나는 김치를 더 받으러 가는 척하고 현장에서 불법 거래를 적발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당당했다.


“서로 먹어주는 거예요. 저희도 정말 못 먹는 음식이 있단 말이에요. 야채를 먹긴 먹잖아요.”


논리 정연한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음식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한 아이가 일방적으로 먹어주는 것도 아니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그런데 몇 주 뒤, 난감한 장면을 목격했다.


다른 나라 음식 체험의 날에 나온 사과 파이를 A가 B에게 건네주는 것이다. 사과 파이 같은 디저트는 거의 양보하지 않는 고급 메뉴다. ‘은근한 강요에 의한 갈취?’ 같은 의심이 먼저 떠올랐지만 둘의 원만한 관계를 알기에 가만히 있었다. 문제는 이 주 뒤에 발생했다. 이 날은 특식으로 회오리감자가 나왔다. 사과파이 때와 마찬가지로 A가 B에게 감자를 넘겼다. A표정이 어두웠다. 순간 학교 폭력의 징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B를 밖으로 불렀다.


“친구 간식을 가져가면 어떡하니? 저번에도 그러더구나.”

“A가 살 뺀다고 해서 도와준 건데요? 물어보세요.”

“아…… 잘했네.”


진짜로 A가 독하게 살 뺄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얼굴이 어두웠던 건 단지 회오리 감자를 너무 좋아해서 그랬다고 했다. 나는 정색한 얼굴로 착한 아이를 불러내 어색하게 칭찬한 선생님이 되고 말았다. 오늘은 내가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접에 담긴 물을 마시고 있으니 C가 따끔하게 충고했다.


“밥 먹고 바로 물을 그렇게 마시면 몸에 안 좋아요. 선생님도 참.”


나는 식판을 반납하고 나서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C에게 대답했다.


“사실 조리원 할머니가 물을 떠주셔서 안 마실 수가 없었어. 맨날 밥 늦게 먹어서 물 못 마신다고 따로 챙겨주신 물이거든. 양이 좀 많긴 했지만.”


C는 짧게 탄식을 내고는 엄지손가락을 쳐들었다. 역시 남의 식판 사정은 들어 봐야 아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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