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개발원 「2016 GED 종합자료실 활용스토리」 공모전 장려
헤어지는 건 언제나 힘든 법이다. 올해의 마지막 영재 수업을 앞두고 마음이 허했다. 함께 하는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고 머리로는 이해해도, 이별해야 하는 시점이 가까워지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덧없이 흐르는 시간이 야속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것이 자연의 질서인 것을. 아쉬움에 젖어 있기보다는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우리 수업을 특별하게 만들어줄 비밀은 '시간'이었다.
시간에 대한 선행연구가 필요했다. 단박에 GED 영재교육종합데이터베이스가 떠올랐다. 2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영재 첫 수업을 앞두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막막했다. 아는 사람도, 영재 교육 경험도 전무했던 내가 의지할 곳은 GED가 전부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접속한 GED는 그 이후로 영재 수업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교과별, 주제별로 정리된 방대한 자료를 처음 열람하던 날의 두근거림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번에도 GED의 문을 두드렸다. 종합자료실에 접속해 '시간' 키워드를 입력했다. 양질의 자료가 다수 검색되었다. 그중 홍태완 교사의 <너의 이동 흔적이 보여> 외 몇 개의 프로그램을 변형하여 수업 계획을 짰다. 홍 선생님의 프로그램은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활용하여 시간과 속력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1년간의 활동을 되돌아보고 성장의 의미를 깨닫는 수업으로는 제격이었다.
11월 22일 화요일 오후 4시. 한 장의 사진을 스크린에 띄우면서 수업이 시작되었다. 픽스아트(PICSART)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하여 아홉 장의 사진을 콜라주 형태로 재배치한 사진이었다.
"여러분, 이 사진에는 몇 개의 시간이 담겨있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색한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었던지 씩씩한 채원이가 번쩍 손을 들었다.
"딱 봐도 아홉 개네요."
"맞아요. 여러분들이 1년 간 활동한 모습 중 서로 다른 아홉 개의 순간들을 담았어요."
다른 활동사진을 음악과 함께 슬라이드 쇼로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지난날의 흔적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성장기 아이들의 변화는 얼마나 빠른지, 3월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달랐다. 키가 자랐고, 얼굴에 여드름이 늘었다. 외모의 변화만큼이나 내면도 성장한 것일까? 슬라이드 쇼가 종료된 후 조용히 물었다.
"어때요, 올해 영재 수업을 받으면서 많이 성숙해진 것 같나요?"
아이들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더니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선생님이 보기엔 예전보다 훨씬 많이 컸어요. 오늘은 우리가 1년 간 성장한 정도를 그래프로 그려볼 거예요."
학생들은 추상적 개념인 '성장'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표현할지 의아하다는 눈치였다. 이 활동은 GED 종합자료실에 탑재된 이연희 교사의 '나의 최고속도를 구하라' 프로그램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실제 과정은 매우 간단하였다.
1) 그래프의 가로축은 월(month), 세로축은 성장도를 의미한다. 성장도는 0에서 10까지 표시할 수 있다.
2) 학생들은 자기 평가를 통해 월별 성장도를 점으로 표시한다.
3) 점과 점을 직선으로 이어 꺾은선 그래프를 완성한다.
톡톡톡, 점찍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아이들은 신중하게 점을 찍었다. 스무 명이 그린 그래프 중 똑같이 생긴 그래프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우리는 그래프에서 상승과 하강의 흐름이 바뀌는 지점에 동그라미를 치고 <봉우리>와 <계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봉우리>는 특정 기간 중 성장 정도가 정점을 찍는 지점이고 <계곡>은 그 반대를 의미했다.
영재반 친구들은 <봉우리>와 <계곡> 옆에 그 당시의 주요 사건과 심경을 짧게 기록했다. 그 후 모둠별로 번갈아가며 봉우리와 계곡에 적힌 내용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래도 어느 누구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그래프에 적힌 글자를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중등 과학영재 포트폴리오 실험을 준비했다. 몸은 고되지만 많이 배웠다. - 6학년 김은수 -"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다. 적응하느라 지친다. - 5학년 안주현-"
서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이야기가 들리자, 청중은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였다.감동적인 사연에는 박수를 보내고, 힘겨운 시간을 이겨낸 아이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명랑 소년 태균이는 하이파이브를 시도했다. 방식은 저마다 달랐지만 친구에게 건네는 작은 손길 하나하나가 귀하고 고왔다.
"선생님, 그래프를 그려서 힘든 기억이나 즐거운 추억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해요."
눈망울이 사슴처럼 초롱초롱한 지민이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또 발표할 때 긴장되었지만 도연이가 경청하고 위로해주어서 좋았다고 덧붙였다. 환하게 웃는 지민이가 참 예뻤다. 그녀의 말은 전적으로 옳았다. 협동은 영재 수업에서 필수다. 영재는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 인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와 마주할수록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모아야 한다.
이어지는 수업 활동에서는 앞서 제작한 '월별 성장 그래프'를 이용하여 속력의 개념을 알아보았다. 이 과정에서 '모셧 샷(MOTION SHOT)'이라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도입하였다. 모션 샷은 고가의 DSLR 카메라가 제공하는 '다중노출 촬영' 기법을 무료로 구현해주는 앱으로 속력을 공부하는데 매우 유용했다.
이 발상은 GED 종합자료실에 있는 홍태완 교사의 '너의 흔적이 보여' 프로그램을 공부하면서 떠올랐다. 다만 원자료에서는 카메라 플래시 라이트 점멸 주기를 조절하고, 셔터 스피드를 느리게 설정하는 등 학생들이 직접 수행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단순하면서도 유사한 결과물을 낼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모션 샷 수업을 고안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어려워하면 어쩌나 우려스러웠다.
완전한 기우였다. 아이들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모션샷 사용방법을 익혔다. 쓱싹쓱싹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월별 속력 그래프'가 완성되었다. 놀라기는 일렀다. 그래프 작성이 종료된 모둠에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작품 사진 찍기' 미션을 주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작품들이 탄생했다. 스무 일곱 편의 제출작 중 인상적이었던 두 작품을 소개한다.
- 제목 : 청소부의 고단한 하루
- 설명 : 성실한 청소부의 인생에서 느껴지는 피곤함을 여러 개의 발걸음으로 표현했다.
- 제목 : 학교폭력의 후회
- 설명 : 화가 난다고 친구를 때리지 않았더라면... 다시 친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기대한 수준을 상회하는 작품이었다. 교사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이 담겨있는 사진 한 장을 요구했으나 아이들은 사진에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 학교폭력, 사회적 약자, 소외 등 묵직한 주제들이 눈에 띄었다. 안심이 되었다.
영재반 아이들은 대부분 경제적 수준이 높고, 관계가 안정되어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 어떤 관점에서는 행운아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들을 너무 당연하게 여길까봐, 주변에 조금 어려운 사람들을 낮게 바라볼까 걱정했다. 이날 사진에서 보여준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
"선생님 오늘 수업 재밌었어요. 마지막 수업이라 하니까 아쉽네요."
수업이 끝나고 지우가 따로 찾아와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그간 수업 열심히 잘 들어줘서 내가 더 고맙다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다른 친구들 자리까지 꼼꼼하게 정돈해주고 가는 아이. 그녀는 중학교 과학 영재반에 진학할 계획이다. 인성과 실력을 겸비한 지우를 보며 마음이 흐뭇해졌다.
집으로 돌아와 수업 기록을 남겼다. 수업이 잘 된 날이면 기쁨과 감동을 나누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성공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GED 종합자료실에 올라온 무수한 자료들도 그런 마음의 결과물이 아닐까? 나는 이것이 집단지성의 힘이라고 본다. 한 사람의 천재적인 재능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열정과 노력이 모일 때 더 큰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주제로 한 수업을 잘 정리해서 나눠줄 궁리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