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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미 Jul 27. 2023

펑크 음반사의 프로그래머

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37

스트레이는 정착한 후로는 어떤 종류의 위험이든 별로 겪은 적이 없다. 프로그래머로 취직했기 때문에 주 5일 출근해서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평범한 생활을 오랫동안 이어 나갔다. 다른 프로그래머들과의 차이점은, 스트레이의 직장은 펑크와 메탈 음악을 만드는 음반사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무직과는 환경이 좀 달랐다는 것이다. 음반사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스트레이와 잘 맞았기 때문에 이것은 큰 장점이었다. 많은 직원들이 스트레이와 마찬가지로 문신을 했고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출근했다. 또 많은 직원들이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르고, 점심시간에는 맥주를 마시고 퇴근해서는 마리화나를 피웠다.


좋아하는 장르의 음반사에서 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좋은 일이었다. 예전부터 좋아하던 밴드들의 음악을 업무 시간에 들을 수 있었고, 멤버들을 직접 만날 기회도 있었다. 한 소속 밴드가 회사 건물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해서 회사에 하루 종일 메탈 음악이 울려 퍼진 날도 있었다. 프로그래밍은 머리를 많이 쓰는 일이어서 음악 때문에 정신이 산만했을 법도 한데 스트레이는 그 날 오히려 즐거워했다.


하지만 일하기 쉬운 직장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사장은 회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아주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다. 직원들, 소속 뮤지션들, 같은 업계의 다른 회사 사람들까지 무자비하게 괴롭히고 모욕하고 협박했다. 사장의 이름을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가장 먼저 고발성 기사들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일주일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두는 직원들이 아주 흔해서, 오래된 직원들은 새 직원이 얼마나 버틸지를 두고 몰래 내기를 했다.


- 새로 들어온 여직원들은 거의 다 사장 때문에 울어.

- 그럼 새로 들어온 남직원들은 울고 싶을 때 어떻게 해?

- 사무실을 나가서 다시는 안 돌아오지.


신기한 점은 사장이 스트레이를 괴롭힌 적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스트레이는 입사한 지 몇 주가 지났을 때, 사장이 자신의 상사를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사장이 자신에게 그렇게 행동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도 잘 모른다고 한다. 아마 소위 ‘강한 사람에게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 강한’ 유형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스트레이는 조금만 대화를 나눠 봐도 성격이 강하고 주관이 뚜렷하다는 것이 금방 전해지는 사람이다.


스트레이는 처음에는 음악과 관련된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신나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러나 스트레이는 곧 음악계의 이면을 알게 되었다. ‘고뇌하는 예술가’는 단순한 스테레오타입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대부분의 뮤지션들은 창작의 고통을 겪을 뿐 아니라 꽉 짜인 스케줄 속에서 평범한 회사원과 마찬가지로 정신없이 일했고, 음악으로 먹고 산다는 사실에 대해서 크게 행복해 하지도 않았다. 음악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입사했던 음반사 직원들은 생각보다 훨씬 무미건조하고 바쁜 업무에 금방 환멸을 느꼈다. 스트레이는 자신이 비록 음반사에서 일하기는 해도 음악과 직접 관련된 일은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자신의 처지에 불만은 없었다. 스트레이가 어릴 적 슬럼가에서 사귄 친구들 중에는 스트레이처럼 화이트칼라 직업을 가져 본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리고 친구들 중 여러 명은 히스패닉들이 흔히 그렇게 하듯 젊은 나이부터 아이를 많이 낳았다. 그 아이들에게도 가난이 대물림될 것이다.


다만 스트레이의 정착을 도왔던 친구 두 명은 좋은 직업을 가지고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다. 한 명은 슬럼가에 있기는 해도 부자인 집에서 자랐다. 부모가 의사였기 때문에 자신도 자연스럽게 종합병원 간호사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종합병원 간호사는 좋은 직업이지만 미국에서는 그보다도 더 좋은 직업이다. 다른 한 명은 냉난방 기술자다. 미국에서 전문 기술자는 좋은 대우를 받는 직업군일 뿐 아니라, 강력한 노동조합이 있는 거의 유일한 직업군이기도 하다. 이 친구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스트레이도 부모에게 물려받은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노숙을 시작하기 전 사귄 친구들 중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흐지부지 연락이 끊기지 않은 친구는 이 둘뿐이다. 처음부터 그만큼 친했기 때문에 스트레이를 도와줬을 것이다. 또 아마 그 경험을 통해서 우정이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모두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지위가 서로 비슷했고, 이 부분도 교류가 계속 이어지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좋은 직업이라는 공통점이 사라지고 말았다. 스트레이가 팬데믹 때 실직한 후 우울증을 치료하며 칩거 중이기 때문이다. 두 친구는 예전부터 스트레이가 우울증이 심해져서 사람을 피할 때도 항상 연락을 잊지 않았다. 특히 기술자 친구는 만나서 놀자고 꾸준히 불러낸다. 스트레이는 돈 문제 때문에 거절할 때가 훨씬 많지만, 그래도 자신의 거절을 서운하게 여기지 않고 계속 불러 준다는 사실을 고맙게 여긴다.


음반사에서 자리가 잡힌 뒤로는 모니터 세 개를 혼자 썼다. 맨 왼쪽 모니터는 코드를 읽기 편하도록 세로로 설치했다.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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