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차 사라지는 많은 것들.

by 얼간이

1.

예전에 무슬림 테러리스트 용의자에게 CIA가 자주 쓰고 꽤 효과가 좋은 고문에 관한 NGC 기사가 있었어요.

대부분 중동 출신인 사람들에게 종일 팝(POP)을 들려주는 거라네요. 한때 1등 고문 음악으로 마이클 잭슨의 Beat It과 마돈나의 음악(아마도 like a virgin?)과

베토벤의 교향곡이 뽑혔다고 해요.


중동의 대부분 음악이 트롯 풍인데 팝과는 기준 리듬 자체가 못 참을 정도로 안 맞았나? 어쨌거나 그게 얼마나 힘들던지 음악 고문을 시작하면 사람들이 시름 시름 앓았다고 해요.


그런데, 만약 휴양지에서 그런 음악을 들었어도 정말 그 사람들이 병들고 죽어갔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요.


정말 그 사람들을 괴롭힌 게 정말 음악(또는 소음)일까?


2.

80년대 후반, 정오의 클래식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듣는데 어떤 독거노인께서 보내신 사연이 나왔어요.


인생 최고의 고통은 가난도, 약해진 건강도, 자기 먹고살기 바빠 오지 못하는 자식들이 아닌 중고 라디오가 종종 먹통이 되어 좋아하는 클래식을 못 듣는다는 거였어요.


애청자였던 저는 다음 주에 그분을 위한 카셋 플레이어가 방송국에 쇄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지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모노로 듣는 클래식보다 더 놀라운 일은 그런 상황에서 '소리'에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일 거예요.

순전히 마음과의 싸움일 거예요.

보통 일은 아닌 거죠.


3.

크리스마스나 새해에는 메가박스 같은 극장에서 뉴욕 필, 빈필, 베를린 하모니의 공연 실황을 중계해 주는데 음향 특화 관인 M2 관에서의 공연은 매우 훌륭해요. 아내는 '졸려서 싫다' 해 저만 갑니다.


현지 실황중계라 대부분 조조 상영이죠. 주제도 제한적이고 오는 사람만 오고 그러다 보니 선호 좌석도 대부분 고정이고 본 사람 자주 봅니다.


우연히 근처에 앉게 되어 대략 여덟, 아홉 번쯤 뵈었던 어르신이 계셨어요. 족히 팔순은 넘어 구순은 되어 보이셨어요


일 년 내내 캐주얼인 저도 그런 날은 비즈니스 슈트로 갑니다만... 그분도 늘 깔끔한 정장을 하고 오셨고 자주 뵈니 눈인사도 종종 드리고 그랬어요. 이분은 피날레에서 늘 기립 손뼉을 치셨어요. 훌륭하긴 하지만 기립박수까지는 의향이 없었던 저는 그분의 '감동'을 깨지 않으려고 가만히 앉아 있곤 했어요. 물론 다른 분들도 여러 가지 이유겠지만 가만히 지켜봤고요.


그런데 이분이 그해 크리스마스의 뉴욕 필 하모닉 공연에 안 오셨어요. 그리고 일주일 후에 있었던 신년 베를린 필 하모닉 공연에도 안 오셨고요.


모두 착석하고 상영관의 불이 꺼질 때 그분이 늘 앉으셨던 첫 줄 한가운데를 보니 아무 이유도 없이 마음이 덜컥하더라고요.


신년 공연은 가히 최고라 할 정도로 훌륭했어요. 선곡부터 진행의 모든 것이 완벽했어요.

진짜 완벽했는데... 우울하더라고요.


사실 공연 내내 그랬어요. 그래서 그때는 감동이 크게 없었어요. 심지어는 괴롭기까지 하더라고요.

빨리 자리 털고 일어나고 싶은 그런 생각.


이게 음악은 몹시 훌륭한데 감동은 없는 이상한 상황이잖아요?



비슷한 연배이신 저희 집 어른도 그 즈음 갑자기 병환 중이셔서 그랬을 것이고 무엇보다 몹시 사랑하는 무언가를 두고 갈 때의 슬픔에 공감한다거나...

여하튼 그런 오묘한 기분이어서 좋은 영화를 보며

가스불을 켰나 껐나 고민하는 주부 같은 기분이었어요.


기분... 좋은 기분...


감옥에 있는 무슬림 같은 심정처럼 어른의 병환을 떠 올리게 하는 그분의 부재가 음악을 음악으로 들을 '겨를'이 없도록 했고 그게 멋진 음악회를 만끽하지 못한 이유일겁니다.


4.

서로 나이가 드니 아내의 일상적인 목소리가 전보다 훨씬 커집니다. 정확히는 크게 들리는 거겠죠.

작게 이야기해도 된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크게 의미는 없을 거예요. 그걸 잘 알고요. 그게 가능하다면 어찌 보면 장쾌하고, 어찌 보면 경박한 중년 여인들의 박장대소가 눈길을 끌 일은 없을 테니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걸 음악처럼 들어왔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 같았어요. 한때는... 지금도 사실, 작고 나직이 이야기하는 걸 몹시 좋아하고요.


시간이 지나며 사라지는 것들 중 하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라지는 학습적 소양이 만들어낸 여유 따위보다 이런 상실이 더 클 때가 있는데 한편으로는 80년대 그 빈한한 노인이 모노 클래식에도 감격할 수 있었던걸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5.

저도 아랫배에 힘을 빼는 연습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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