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사람 론(論)

by 얼간이

착한 사람은 늘, 일찍, 조용히, 그러니까 지극히 '착하게' 죽는다.

나는 이점이 늘 안타깝고 더불어 억울하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이던 고)이규태 선생의 '한국, 한국인'에서는 지극히 '자학적인' 한국인만의 속성 때문이라고 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해외 근로자가 급여에 불만이 있을 때 다른 나라 사람들은 태업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월급을 반납하고 더 열심히 일하더라는 일화 때문일 것이지만 착한 사람만 늘 착하게 죽는 일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사회 초년생일 때 지극히 '거슬리는' 목청을 가진 어떤 팀장은 늘 점심시간만 되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밥이 넘어가냐? 씨발놈아!" 하고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러면 내 대학 선배이자 지극히 '착한' 고참이 양치도 못한 채 헐레벌떡 그 사람 앞에 도열하곤 했다. 그는 종종 그들의 배를 쿡쿡 찌르거나 잘 길들여진 말의 고삐를 채듯 허리띠를 잡고 밀었다 당겼다 하며 욕질을 했다.


'아니 저런 미친놈이... 애가 둘인 아빠이자 가장에게 저런 저급한 쌍욕을...' 싶은 생각을 나만 한건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선배는 늘 체념하는 표정으로 자기가 잘 못해서 그렇다거나 억울하지만 참을 수 없다.는 정도의 표정으로 기가 죽어있었다.


지금이야 가스라이팅 따위의 여러 가지 심리묘사가 있겠지만 그때는 그저 '안쓰러움'이 동반된 '동지의식' 정도되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마음 깊은 분노를 가지곤 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지만 종종 개소 말이 창궐하는 사무실에서 오래 근무를 하다 보면 한 번쯤 마주치는 '개소말' 다운 리더가 '개소말'을 부르짖는 게 어느새 익숙해지게 된다.


"아니... 애가 둘이나 되는 가장에게 저런 쌍스러운..." 하는 분노가 아니라 이 인간은 왜 이런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지랄일까?" 하는 의구심이 더 큰 익숙함.

그러다 문득 '못된' 나는 생각한다. 착하게 살면 안돼.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의 기준으로 못된 놈들을 보기 때문에 그 해결책 또한 '착하다'.


하나마나 하지만 늘 정상적인 경로 같은 면담이나 감성적인 호소나 아니면 딴에는 최선을 다한 인내로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애가 둘이든 셋이든,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소중한 자식이자 한 가정의 중추인 사람, 그보다 자신과 똑같이 희로애락을 느끼는 하나의 인격체에게 "씨발놈아, 좆같은 새끼야"를 내뱉을 수 있는 인간에게 "착한 기대"를 하는 것이야말로 지나치게 착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착한 사람은 결국 늘, 일찍, 빠르고 조용히 죽어간다. 지극히 착한 범주 내의 '억울함'만을 가지고.


착하게 살지 말지어다.

착하게 살라고도 가르치지 말지어다.

좋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착한게 대체 뭐냐?


틈만 나면 밥이 넘어가냐?라고 소리를 지르며 전화기를 부숴댔던 사람이 승승 장구를 할 때 아무도 모르게 나는 결심했었다. 착하게 살지 말자. '착한' 고참의 저런 슬픈 표정을 닮을까 무서웠던 까닭이다.


툭하면 책상을 뒤집어엎고 이 새끼 저 새끼 쌍욕을

하던 리더가 "두 아이의 아빠이자 한 가장의 가장"인 내 뒤통수에 30센티미터 자를 튕겼다.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는 모르되, 열한 살이나 많은 그에게 개소말을 퍼붓고 책상을 밀치고 그 사람의 멱살을 잡았을 때도 솔직한 내 심정은 지금 내 표정이 그 '착한' 고참의 표정일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래도 아무일 없었다. 못된 놈들은 타인의 천금같은 피해보다 자기의 티끌만한 손해가 더 무서운 법이니...

내가 못돼서 나에게는 참 다행인 일이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회사에서 잘리는 것? 그것 말고 뭐가 있지?


착한 사람은 늘 빠르고, 조용하게, 그리고 착하게 죽는다.

억울한 일이다. 못된 놈을 착한 기준으로 바라보는것 그 자체가 진심으로 억울한거다.


못된 놈은 늘, 못된놈 기준으로 못되게 잘 살기 때문이다.


이게 착한 놈이 끝까지 살아야 할 이유인 것이다.

죽지 말자.

만사에 좋은 사람이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심장에 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