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설가 이관용 님의 작고 소식을 뒤늦게 들었어요.
어느 학교에나 있을법한 키 크고 조숙한, 큰 누나 같은 여학생이 하나 있었어요.
꽤나 뛰어난 작문과 강독 실력이 있었던 초, 중 동창인데 고등 1학년 때 우연히 만나 언 듯 내 꿈이 소설가라고 말했던가 봐요. 그러고는 (불량하지는 않지만 엄마가 알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을) 어른 소설을 읽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니
이 모모라는 이름의 그 친구는 "작은 아버지가 꽤나 이름이 있는 소설가"이며 "원하면 한 번쯤 (진짜 소설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했어요.
그러면서 그 '감추고 싶은 소설'이 무엇인지 물었는데 "너는 '잘 모르는' 분이겠지만 정말 괜찮은 소설을 여러 개 쓰신 이관용 님의 <새벽이면 도는 바람개비>"라 말했죠
그러자 모모가 배시시... 웃었었어요
그 아이가 말한 작은 아버지가 바로 이 관용님이었기 때문이죠.
웬일인지 그 이후에 어떤 담소가 오고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난생처음 팬덤을 이해하는 순간이랄까.
만약에, 내가 그분을 뵙고 그분은 까까머리 고등학생의 창대한 꿈을 들었다면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종종 생각해요.
세상의 모든 죽음이 대부분 아쉽고 슬프지만 조금 더 아쉬운 이별이죠.
이렇게 단 한 번의 조우도 없었음에도 심장에 남는 사람이 있어요.
2.
과거를 자주 떠 올린다고 과거에 얽매여 산다는 의미는 아닐 거예요.
얼결에 옛날, 배낭여행 중 일을 털어놓고 보니 이유 없이 밤새 잠을 뒤척이게 될 때가 있군요.
25년이 지났는데도 아련하기는커녕 손에 쥔듯한 그날의 냉기가, 기를 한곳에 모은 마술사의 손을 괴롭히듯 몹시 차갑군요.
말이 많아지는 걸 경계하자. 가벼운 말을 멀리하자. 하면서도 종종 떨어지는 낙엽만 보고도 웃음을 터뜨리는 열아홉처럼 미친 듯이 수다를, 미친 듯 질주를 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던 그때는 정작 왜 못 그랬을까?
또 밤을 뒤척여요.
무슨 수가 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심장에 남는 아쉬움도 있죠.
3.
종종 제 유년의 한편을 담당하던 '우철이 삼촌'은 동내에서 돼지를 잡는 전문이었는데, 온 동네에 돼지의 울음이 꽥꽥 퍼진다는 건 우철이 삼촌이 예전과 달리 일발 필살을 못한 '실수'를 한 탓일 거예요. 하지만 돼지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끝내 조각조각 나서 접시에 얹히게 되는데, 김이 펄펄 나는 돼지의 조각난 육신을 보면서 저는 이상하게 '외롭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 기분은 말 그대로 외로움이었고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저 돼지를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은 나 하나인가 보다'할 때의 외로움이었어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신이 나서 고기를 뜯는데 나는 차마 못 할 때의 괴이한 외로움 말이죠.
종종, 나를 스쳐간 사람들을 떠 올릴 때 느끼는 외로움과 너무나 닮아 또 밤을 뒤척이곤 해요.
이렇게 또 심장에 남는 기억도 있어요.
4.
종종 옛사랑이 생각나요.
생각난다는 게 못 잊는다거나 그립다는 건 아니에요.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니에요.
그건 그냥 계절이 오고 가는 것과 같아요. 그냥 순리인 거죠. 불현듯 고개를 들어보니 단풍이 들고
불현듯 고개를 숙여보니 눈이 쌓여 있고
불현듯 고개를 둘려보니 봄이고 여름이더라는 그런 문득의 깨달음임을 어찌 설명할까... 싶어 그냥 두기로 해요.
심장에 남는 뭔가를 꺼낸다는 게 원래 어려운 법이니까.
5.
심장에 남는 게 별거냐...
"길치인 나는 종종 길을 헤매는데, 어느 날 불가리아 소피아의 얽힌 실타래 같은 골목길에서 길을 잃었다. 가로등 불빛이 흐릿한 작은 골목을 헤매고 헤매는데 사람 하나 없이 당황스러운 순간, 작고 노회한 노인이 불쑥, 한 3만 년쯤 전부터 그 골목에서 헤맬 운명인 나를 기다리며 서 있었던 것처럼 정말 불쑥, 나타났고 나는 내가 찾는 호텔을 물으려고 손짓발짓을 하는데, 그는 그런 설명 따위는 필요 없어. 하듯 고개를 까딱해 따라오게 하고는 요란스요란스러운 러시아 아줌마가 주인인 호텔의 문을 두드렸다.
고맙습니다. 내가 내민 말보로 담배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는 딱 한 가치만 빼 가버렸고 한 시간을 넘게 헤매면서 왜 이 대문을 못 찾았는지 의아해 하는 내게 그 불가리아 처녀가 또 불쑥 나타났을 때 느꼈던 까닭 모를 신선함을 문득 떠 올리는 일.
알고 보면 별일도 아닌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용사처럼 가볍게 여자를 안아주었을 때 느꼈던 이상한 안락함... 전부가 아닌 그것 한 개만으로도 충분한 무언가...
이렇게 심장에 남는 추억도 있어요.
6.
지난 일을 이야기하는 게 그리움을 뜻하는 건 확실히 아니에요. 진심으로 오늘의 저는 어제보다 오늘에 더 집중했어요.
그리고 문득 '심장에 남을만한 일'들의 텀이
길어지고 있다는 걸 깨닫고 덜컥 놀라고 있어요.
쳇바퀴.
내일은 사람이든, 기억이든, 결심이든, 추억이든 뭐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밤 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