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초반 생인 저는 고3, 학력고사를 마치고 내내 생각하던 겨울 도보여행을 떠났어요.
왜 그런 코스를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서울에서 '걸어서' 경기 광주와 원주와 정선과 동해와 강릉과 속초를 거쳐 고성에 이르는 길이었죠.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또 모르겠지만 비박을 원칙으로 해서 대부분 노숙을 했는데 이 상황을 두자로 줄이면 '걸인'이겠죠. 굳이 관대한 수사로 표현하면 '자발적 걸인'이고요. 그때 제가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밤은 정선역 인근의 산길에서 내려다 본 저녁 즈음의 눈오는 정선역 철길이었어요.
아름다운 안목항과 훗날 고현정 소나무로 유명해질 정동진의 소나무를 거쳐 속초에 도착했는데 그날 드물게 눈이 많이 와서 할 수 없이 여인숙을 찾았어요. 함박눈이 소낙비처럼 내려 가로등이 깜빡깜빡 하는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어요.
그때 지금은 관광 명물이 된 갯배를 탔어요. 백원인가를 통에 넣고 스스로 끄는 방식이었죠. 그때는 너울이 지금 갯배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높고 거칠었는데 울렁울렁 멀미를 느끼며 허름한 여인숙을 잡았어요. 마당을 중심으로 방들이 둘러싼 한옥식이었어요. 마당 한 가운데에 수도가 있었죠. 속초시장 바로 뒷편이었을거예요.
여인숙 아줌마가 제 가련한 대가리에 쌓인 엄청난 눈을 보고 불쌍했던가 고구마와 김치를 내주고는 군불을 불가마처럼 지펴주었어요. 이미 장판이 눌어붙은 자국이 있더만요. 어쨌거나 집떠나 처음으로 지붕 있는곳에서 잠을 자게 되고 덤으로 공용이지만 샤워도 할 수 있었는데 물이 미직지근해 달달달 떨면서 비누칠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노란색 다이알 비누였어요. 훗날 훈련소에서 똑같은 비누를 보고 피식 웃었던 기억입니다.
방으로 들어와 오랜만에 새 옷으로 갈아 입은 저는 개구리처럼 발라당 누워 눈쌓인 마당을 내려다보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군요.
그때 꺼내 읽은 책이 있어요.
김난영씨의 '토담', 당시 우리나라 3대 출판사 중 하나인 동문사 발행이었죠.
그날 밤, 그 피곤하고 나른한 밤에 쉽게 잠이 들 요량으로 꺼낸 책을 읽다 밤을 샜어요.
마지막 장을 읽고나서 드는 생각은 "아~이 책 참 예쁘다 " 였어요. 어찌보면 참 성의 없어 보이는 표지의 책인데 내용은 말이죠. 예뻐요. 정말 괜찮은 밤이었어요.
이 책을 볼때마다 그날, 제가 두손을 모아 받아본 눈송이 들이 주었던 알싸함이 느껴지는것 같아 종종 울컥해요.
30년이 다 되어가는데 느낌은 한결 같다는게 참 놀라워요.
그리고 시를 썼는데...아마도 이랬던것 같다.
" 오늘, 속초항에는 눈이 비처럼 내렸다. 그 눈들이 소낙비 흉내를 낼때 마다 나는 바람이 충만한 헝겁인형처럼 온몸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