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폭탄을 만든 후 핵폰탄에 맞은 비운의 양자 물리학자
요즘 3시간이 넘는 영화를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은 관객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만 도전할 수 있는 영화인 ‘오펜하이머(Oppenheimer)’를 만들어냈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 최초로 핵폭탄을 개발한 이론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의 생애를 그린 영화다.
카이 버드(Kai Bird)와 마틴 J. 셰린(Martin J. Sherwin)이 공동 집필한 2005년 출간된 전기 『American Prometheus』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오펜하이머 박사의 대학원 시절부터 1963년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이 그에게 엔리코 페르미 상(Enrico Fermi Award)을 수여하는 순간까지의 다양한 사건을 모자이크 기법과 교차 편집을 활용해 보여준다. 처음에는 하나로 묶기 어려워 보이는 복잡한 일들이 결국 하나의 삶을 만들어냈음을 드러낸다.
먼저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영국에서 실험 양자역학을 연구하며 이론 물리학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불안과 향수병으로 힘들어했던 젊은 오펜하이머는 수업 중 자신을 면박한 교수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고, 교수의 책상에 놓인 사과에 독을 바르려 하지만, 결국 마음을 바꿔 그 사과를 치운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 오펜하이머는 미국으로 돌아와 캘리포니아대학교(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와 캘리포니아공과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그는 한때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던 생물학자 캐서린 푸닝(Katherine Puening)과 결혼하지만, 정신과 의사이자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던 진 태트락(Jean Tatlock)과도 은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1938년 독일에서 핵분열 현상이 최초로 발견되자, 오펜하이머는 이 기술이 무기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2년, 미국 육군 대령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Groves)는 핵폭탄 개발을 목표로 한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의 책임자로 오펜하이머를 연구부장으로 임명한다.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가 이끄는 독일 핵폭탄 개발 위원회가 먼저 핵무기를 개발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오펜하이머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미 해군에 핵폭탄을 제공하기 위해 연구에 박차를 가한다. 영화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Los Alamos Laboratory)에서 그가 핵폭탄을 어떻게 개발하게 되는지를 중점적으로 그린다.
마지막으로, 오펜하이머를 극도로 싫어했던 미국 원자력위원회(United States Atomic Energy Commission) 위원장 루이스 스트로스(Lewis Strauss)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1954년, 비밀 안전 청문회(private security hearing)를 열어 오펜하이머가 소련의 첩보원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을 빌미로 그의 핵무기 연구 관할권을 박탈한다.
영화가 끝나고 마무리 음악과 함께 자막이 끝없이 화면을 채울 때, 생각했다. 인생은 결국 한순간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아무리 엄청난 성취를 이루고, 세상에 영원히 회자될 영향력을 남겼다 해도, 단 한 사람에게 행한 잘못된 말과 행동이 오펜하이머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특히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며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마치 얼음판을 걷는 듯 조심할 필요가 있다. 루이스 스트로스를 무시하지 않았다면, 수많은 과학자 앞에서 그를 조롱하지 않았다면, 오펜하이머의 위대함을 알아보고 의도적으로 다가온 루이스를 단칼에 내치지 않았다면, 오늘날 역사서와 전기에 기록된 오펜하이머의 삶과 행적은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오펜하이머, 세계 최초로 핵폭탄을 발명한 과학자. 하지만 그의 삶은 초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