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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Jan 22. 2021

정신분석과 이율배반(二律背反)

지도/편달 상담 교육 50회를 마치던 날에

John Martin, The Apocalypse



"그래, 오늘이 함께 상담에 관해 생각하고 연구하는 마지막 날이구나."

"그렇군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이 수업은 제가 환자를 대하는 과정을 보고하고 지도/편달을 받는 게 목적이니 언제나처럼 오늘도 상담 내용을 정리해서 가져왔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블랜튼-필 정신분석가 과정에서 요구하는 지도/편달 수업supervision은 상담 경험이 풍부한 정신분석가를 만나 정신분석가 수련생이 내담자를 상담하다 마주치는 다양한 돌발 상황에 관해 보고하고 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정신 역동의 가능성을 함께 생각하며 토론하는 게 목적이다. 졸업까지 총 정신분석가 3명을 만나야 하고 한 사람과 상담 교육을 최소 50번 받는 걸 원칙으로 한다. 한 번 만날 때마다 일정 금액을 상담료로 지불해야 한다.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진 도제식 교육이 여전히 행해지는 몇 안 되는 현장 중 하나가 정신분석가 지도편달 교육이다. 교육은 45분간 진행되고 개인 상담과 동일하게 수련생이 정신분석가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려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기에 매 교육 시간마다 마음가짐을 야무지게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멍하게 45분이란 시간을 보낸 후 85달러를 꼬박꼬박 지불하는 애석한 순간을 마주해야 한다.


          언제나처럼 내담자와 상담한 내용을 기억을 더듬으며 정리한 상담 일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때 가끔씩 눈에 들어왔던 정신분석가의 행동이 내 관심을 사로잡았다. 내가 상담 일지를 읽기 시작하자 분석가는 손전화기를 들어 무언가를 확인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줌Zoom이란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만났기에 그런 당신의 행동을 내가 눈치채지 못하리라 생각했겠지만 손전화기 잠금장치를 열었을 때 밝게 빛나는 화면 빛은 분석가 얼굴에 비쳤고 반짝거리는 얼굴은 컴퓨터 카메라에 잡혀 내 컴퓨터 화면에 아주 선명하게 드러났다.


'야, 이거 한 번 두 번도 아니고 마지막 교육 때도 이러는구나. 이걸 어쩌지?'


          미국 맨하튼에 정신분석가로 둥지를 튼 후 수십 년간 살아온 그를 향해 정신 차리고 내가 읽는 상담 일지에 귀 기울여 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난 어차피 한국에서 날아온 국제학생에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아시아인Asians이라는 항목에 끽하는 소리 한 번 제대로 내

지 못하고 휩쓸려 들어가는 존재이지 않던가?


          상담 일지를 끝까지 읽은 날 기다려준 분석가를 귀담아 듣는 걸 다시 강조했다. 그러고 보니 20번째 교육 이후로는 특별히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귀담아 들어라. 환자가 하는 말에 집중해라. 환자가 하는 말속에 담긴 경험을 듣고 그 경험에 반응해라. 끊임없이 환자에게 질문에서 환자에 관해 계속해서 더 많은 걸 알려고 노력해라. 그날 내가 준비해 간 상담일지는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슬쩍 보면 흑인으로 손쉽게 분리할 수 있는 26세 청년이었다. 건축가로 일하는 그가 사는 아파트 한쪽 벽에는 <비상구>라고 적힌 작은 벽보가 붙어 있다. 단 한 번도 내 국적에 관해 이야기 나눈 적은 없었지만, 나는 그가 내가 한국인이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역시 이를 짐작했기에 앞으로도 이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그가 며칠 전 매주 빼먹지 않고 언급했던 만남 주선 앱을 통해 만난 여자들이 실은 성교를 위한 하룻밤 만남이었다고 고백했다. 성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대답했다.


"성교? 사는데 꼭 필요한 것? 뭐 그러니까 음식을 먹는 거랑 비슷하다고 해야하나? 근데 배고프면 음식은 반드시 먹어야 하지만, 성교는 뭐 필요한 사람을 만날 때까지는 연기하고 기다릴 수 있는 것. 그런 거 같은데."


          이리도 깔끔하고 정갈하게 짜증날 수가 있었을까? 그렇게 살아본 적 없는 내 신세의 처량함을 직시하게 해 준 내담자에 관한 약간의 분노를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내담자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들어줬다. 이에 관한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분석가가 말했다.


"한 가지 꼭 말해주고 싶은게 있는데, 성이라는 게 삶에서 중요하다는 건 잘 알지? 그래서,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성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다르게 가치를 판단하면서 살아가거든. 그러니까, 누군가가 자기 성생활에 관해 말하면 주의 깊게 들어줘야 해. 더 많은 걸 알아내기 위해서."

"그리고, 이제 마지막 5분이 남았는데, 너와 나에 관해서 이야기를 좀 했으면 좋겠다. 너랑 지도/편달 수업을 지금까지 잘 해올 수 있어서 즐거웠고, 네가 좋은 정신분석가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천천히 배워나갈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해. 내가 너를 조금은 속도를 늦출 수 있게 도와준 거 같다."

"네, 그렇게 해줬죠. 고맙습니다."

"그래, 그럼, 졸업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는거야?"


          '무슨 소리지? 난 그런 말 한적 없는데...' 총 50번 지도/편달 교육을 진행하다가 그가 두 번 뜬금없이 졸업 후 내 진로에 관해 물은 적이 있다. 처음에 교회와 학교, 상담가 이 세 가지 길 중에서 먼저 손에 잡히는 걸 시작으로 가능하다면 세 가지를 다 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 뜬금없이 물어왔을 때, 이전에 한 이야기를 기억 못 한다는 걸 인지했고, 똑같은 이야기를 새롭게 반복했다. 그리고 두 달 전 조기 졸업 가능성에 물으며 졸업 시기에 접어들어 한국과 미국에서 일자리를 동시에 알아보려 한다는 생각과 함께 졸업 후 미국에서 상담가로 정직원 자리를 구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당신은 잘 알지 못하고 내가 목사이니 교회를 알아보는 더 좋지 않겠냐는 답변을 들었다.


"졸업 후에 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그냥 미국에서 상담가로 일하면 안 되나?"

"아니...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그리고 내가 전에 그걸 물었을 때, 교회 일자를 알아보라고 해서 미국 내 상담가로 일자리를 구하는 건 잠깐 옆으로 놓아두었었거든요. 사실 좀 혼란스럽네요."

"뭐가 혼란스럽지?"

"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내가 말한 적도 없는 걸 당신은 이미 내가 말한 걸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혼란스럽네요."


          '내담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해준 이가 당신인데, 당신은 정작 내가 진지하게 물은 내 상황에 관해서 왜곡된 기억을 사실로 기억하고 있으니 혼란스럽네요.'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침묵이 찾아왔다. 지도/편달 교육 마지막 날 지금까지 지도했던 학생에게 약간의 관심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 같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리를 잘못짚어도 한참 잘못짚었다. 이민과 신분에 관련한 질문은 이민을 염두에 둔 사람에게는 무척 세심한 주의를 요구하는 아무에게 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특히나 부양해야 할 가정이 있는 중년 남자에게는 더욱더.


"자 이제 우리 마쳐야 할 시간이네."

"네, 알겠습니다."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내 첫 번째 지도/편달 선생은 자리를 떠났다. 귀기울임의 중요성을 나에게 가르쳐 준 선생은 내게 귀 기울이지 않고 떠났다. 아니 어설프게 귀 기울인 게 들통나서, 어설프게 관심을 표현하려다 헛다리 짚은 게 탄로 나서, 당황스러움을 침묵 속에 숨긴 채  숨죽이고 버틴 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담자를 상담 속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상담가의 두 가지 무기 중 하나인 시간을 요긴하게 잘 활용하여 소리 소문 없이 도망갔다. 묘한 씁쓸함은 곧바로 묘한 허탈함으로 변했다. 묘한 허탈함 끝에는 괜한 말을 했나란 이유 없는 후회와 망설임이 찾아왔다. 아내에게 이를 하소연하고, 내 개인 상담가에게 이를 털어 넣고, 이틀이 지난 후 깨달았다. 그날 내가 느낀 씁쓸함과 허탈함, 후회와 망설임은 이율배반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다른 이를 향한 귀기울임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또한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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