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과 이율배반(二律背反)

지도/편달 상담 교육 50회를 마치던 날에

by 흐르는 강물처럼
John Martin, The Apocalypse.jpg John Martin, The Apocalypse



"그래, 오늘이 함께 상담에 관해 생각하고 연구하는 마지막 날이구나."

"그렇군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이 수업은 제가 환자를 대하는 과정을 보고하고 지도/편달을 받는 게 목적이니 언제나처럼 오늘도 상담 내용을 정리해서 가져왔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블랜튼-필 정신분석가 과정에서 요구하는 지도/편달 수업supervision은 상담 경험이 풍부한 정신분석가를 만나 정신분석가 수련생이 내담자를 상담하다 마주치는 다양한 돌발 상황에 관해 보고하고 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정신 역동의 가능성을 함께 생각하며 토론하는 게 목적이다. 졸업까지 총 정신분석가 3명을 만나야 하고 한 사람과 상담 교육을 최소 50번 받는 걸 원칙으로 한다. 한 번 만날 때마다 일정 금액을 상담료로 지불해야 한다.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진 도제식 교육이 여전히 행해지는 몇 안 되는 현장 중 하나가 정신분석가 지도편달 교육이다. 교육은 45분간 진행되고 개인 상담과 동일하게 수련생이 정신분석가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려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기에 매 교육 시간마다 마음가짐을 야무지게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멍하게 45분이란 시간을 보낸 후 85달러를 꼬박꼬박 지불하는 애석한 순간을 마주해야 한다.


언제나처럼 내담자와 상담한 내용을 기억을 더듬으며 정리한 상담 일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때 가끔씩 눈에 들어왔던 정신분석가의 행동이 내 관심을 사로잡았다. 내가 상담 일지를 읽기 시작하자 분석가는 손전화기를 들어 무언가를 확인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줌Zoom이란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만났기에 그런 당신의 행동을 내가 눈치채지 못하리라 생각했겠지만 손전화기 잠금장치를 열었을 때 밝게 빛나는 화면 빛은 분석가 얼굴에 비쳤고 반짝거리는 얼굴은 컴퓨터 카메라에 잡혀 내 컴퓨터 화면에 아주 선명하게 드러났다.


'야, 이거 한 번 두 번도 아니고 마지막 교육 때도 이러는구나. 이걸 어쩌지?'


미국 맨하튼에 정신분석가로 둥지를 튼 후 수십 년간 살아온 그를 향해 정신 차리고 내가 읽는 상담 일지에 귀 기울여 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난 어차피 한국에서 날아온 국제학생에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아시아인Asians이라는 항목에 끽하는 소리 한 번 제대로 내

지 못하고 휩쓸려 들어가는 존재이지 않던가?


상담 일지를 끝까지 읽은 날 기다려준 분석가를 귀담아 듣는 걸 다시 강조했다. 그러고 보니 20번째 교육 이후로는 특별히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귀담아 들어라. 환자가 하는 말에 집중해라. 환자가 하는 말속에 담긴 경험을 듣고 그 경험에 반응해라. 끊임없이 환자에게 질문에서 환자에 관해 계속해서 더 많은 걸 알려고 노력해라. 그날 내가 준비해 간 상담일지는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슬쩍 보면 흑인으로 손쉽게 분리할 수 있는 26세 청년이었다. 건축가로 일하는 그가 사는 아파트 한쪽 벽에는 <비상구>라고 적힌 작은 벽보가 붙어 있다. 단 한 번도 내 국적에 관해 이야기 나눈 적은 없었지만, 나는 그가 내가 한국인이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역시 이를 짐작했기에 앞으로도 이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그가 며칠 전 매주 빼먹지 않고 언급했던 만남 주선 앱을 통해 만난 여자들이 실은 성교를 위한 하룻밤 만남이었다고 고백했다. 성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대답했다.


"성교? 사는데 꼭 필요한 것? 뭐 그러니까 음식을 먹는 거랑 비슷하다고 해야하나? 근데 배고프면 음식은 반드시 먹어야 하지만, 성교는 뭐 필요한 사람을 만날 때까지는 연기하고 기다릴 수 있는 것. 그런 거 같은데."


이리도 깔끔하고 정갈하게 짜증날 수가 있었을까? 그렇게 살아본 적 없는 내 신세의 처량함을 직시하게 해 준 내담자에 관한 약간의 분노를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내담자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들어줬다. 이에 관한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분석가가 말했다.


"한 가지 꼭 말해주고 싶은게 있는데, 성이라는 게 삶에서 중요하다는 건 잘 알지? 그래서,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성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다르게 가치를 판단하면서 살아가거든. 그러니까, 누군가가 자기 성생활에 관해 말하면 주의 깊게 들어줘야 해. 더 많은 걸 알아내기 위해서."

"그리고, 이제 마지막 5분이 남았는데, 너와 나에 관해서 이야기를 좀 했으면 좋겠다. 너랑 지도/편달 수업을 지금까지 잘 해올 수 있어서 즐거웠고, 네가 좋은 정신분석가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천천히 배워나갈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해. 내가 너를 조금은 속도를 늦출 수 있게 도와준 거 같다."

"네, 그렇게 해줬죠. 고맙습니다."

"그래, 그럼, 졸업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는거야?"


'무슨 소리지? 난 그런 말 한적 없는데...' 총 50번 지도/편달 교육을 진행하다가 그가 두 번 뜬금없이 졸업 후 내 진로에 관해 물은 적이 있다. 처음에 교회와 학교, 상담가 이 세 가지 길 중에서 먼저 손에 잡히는 걸 시작으로 가능하다면 세 가지를 다 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 뜬금없이 물어왔을 때, 이전에 한 이야기를 기억 못 한다는 걸 인지했고, 똑같은 이야기를 새롭게 반복했다. 그리고 두 달 전 조기 졸업 가능성에 물으며 졸업 시기에 접어들어 한국과 미국에서 일자리를 동시에 알아보려 한다는 생각과 함께 졸업 후 미국에서 상담가로 정직원 자리를 구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당신은 잘 알지 못하고 내가 목사이니 교회를 알아보는 더 좋지 않겠냐는 답변을 들었다.


"졸업 후에 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그냥 미국에서 상담가로 일하면 안 되나?"

"아니...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그리고 내가 전에 그걸 물었을 때, 교회 일자를 알아보라고 해서 미국 내 상담가로 일자리를 구하는 건 잠깐 옆으로 놓아두었었거든요. 사실 좀 혼란스럽네요."

"뭐가 혼란스럽지?"

"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내가 말한 적도 없는 걸 당신은 이미 내가 말한 걸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혼란스럽네요."


'내담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해준 이가 당신인데, 당신은 정작 내가 진지하게 물은 내 상황에 관해서 왜곡된 기억을 사실로 기억하고 있으니 혼란스럽네요.'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침묵이 찾아왔다. 지도/편달 교육 마지막 날 지금까지 지도했던 학생에게 약간의 관심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 같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리를 잘못짚어도 한참 잘못짚었다. 이민과 신분에 관련한 질문은 이민을 염두에 둔 사람에게는 무척 세심한 주의를 요구하는 아무에게 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특히나 부양해야 할 가정이 있는 중년 남자에게는 더욱더.


"자 이제 우리 마쳐야 할 시간이네."

"네, 알겠습니다."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내 첫 번째 지도/편달 선생은 자리를 떠났다. 귀기울임의 중요성을 나에게 가르쳐 준 선생은 내게 귀 기울이지 않고 떠났다. 아니 어설프게 귀 기울인 게 들통나서, 어설프게 관심을 표현하려다 헛다리 짚은 게 탄로 나서, 당황스러움을 침묵 속에 숨긴 채 숨죽이고 버틴 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담자를 상담 속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상담가의 두 가지 무기 중 하나인 시간을 요긴하게 잘 활용하여 소리 소문 없이 도망갔다. 묘한 씁쓸함은 곧바로 묘한 허탈함으로 변했다. 묘한 허탈함 끝에는 괜한 말을 했나란 이유 없는 후회와 망설임이 찾아왔다. 아내에게 이를 하소연하고, 내 개인 상담가에게 이를 털어 넣고, 이틀이 지난 후 깨달았다. 그날 내가 느낀 씁쓸함과 허탈함, 후회와 망설임은 이율배반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다른 이를 향한 귀기울임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또한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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