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흐르는 강물처럼 Jan 06. 2022

연속극 '미생'

영원토록 순환하는 사춘기와 더불어 살기

바둑이 인간 삶의 축소판이 될 수 있을까? 인간 삶을 바둑판 위에 집약해 놓을 수 있을까? 바둑을 둘 줄 모르는 내가 '미생'을 모두 본 후 홀로 멍하게 앉아 있다가 나에게 던진 질문이다. 바둑에 인생을 걸었지만 전문 바둑 기사가 될 수 없었던 청년 장그래가 주변에 아는 이의 도움을 받아 한국 굴지의 무역 회사에 실습 사원으로 취직한 날이 20부작 연속극의 시작점이다. 초등학교 때 바둑을 시작한 그래에게 바둑은 삶의 모든 것이었다. 그래는 인생을 바둑판에서 시작했고, 바둑판에서 끝나리라 믿었다. 세상은 만만치가 않았다. 가난이 드리운 그늘 아래에서 태어나 바둑판을 끼고 바둑판에 의지하며 자라난 그래에게는 바둑이 삶의 모든 것이 될 수 없었다.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어 시간수당을 받으며 일해야지만 바둑판에 바둑알을 놓을 수 있었다. 뭐든 두 가지를 같이 하기란 쉽지 않다. 학교를 관두면 조금 더 시간이 남으리라 생각했지만, 세상은 역시나 머릿속 계산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갑작스레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래는 더 많은 시간을 일에 쏟아야 했다. 살기 위해 일했고, 앞으로 한 걸음 더 나가길 갈망하며 바둑 실력 향상에 매진했다. 전문 바둑 기사가 될 수 있는 국가시험에 지원했지만 매번 떨어졌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굳게 믿으며 도전했고, 다시 도전했지만, 이상은 현실로 변해주지 않았다. 쳇바퀴 굴림에 지친 그래는 바둑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열심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안 해서 인걸로 생각하겠다.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 밖으로 나온 거다. 나는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이었다." 

자원입대한 군대에서 제대한 그래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고등학교 중퇴라는 딱지를 떼내기 위해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래가 왜 고등학교를 자퇴했는지에 관해 세상은 냉담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이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날카롭고 매서웠다. 그가 살아온 삶에 관해 궁금해 하기보다는 선입견과 편견으로 왜곡된 색안경을 끼고 그래를 자기보다 열등한 인간으로 대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래는 어딜 가나 자기가 다른 이보다 열등한 인간이란 편견에 암묵적으로 동조해야 했다. 바둑을 포기했다는 자책과 자괴감이 내면 밑바닥에서 동조를 끌어냈다. 다른 이는 했지만 자기는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기에 그래는 부족함을 숨기지 않았다. 밑바닥에 이르렀음을 진중하게 받아들인 이만이 할 수 있는 용기 어린 몸짓이다. 바둑에서 한 집 차이로 진 아쉬움과 서러움을 자기의 무능함을 탓하기보다는 상대방에게 운이 따랐기 때문이라는 허기진 비난 또한 삼갔기 때문에 그래는 사회가 강요하는 선입견과 편견의 감방 속으로 묵묵히 걸어갔다. 감방을 새로운 삶이 시작하는 훈련소라 생각하면서.  

 

"길이란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길이 아니다.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20년 10월 28일 자 매일경제신문은 한국에 세워진 기업 중 중소기업은 전체 기업의 99.9%에 해당하고, 전체 기업 종사자 중 83.1%가 중소기업에서 일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김수환 교수는 "<미생>이 판타지라고? 아니, '불가능한' 성장 소설!"이란 제목을 붙인 글에서 장그래 법이라고 불린 노동법이 만들어질 정도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미생의 첫 번째 성공 요인은 '평범하게' 노동하는 인간이 주인공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속극 <미생>이 탄생할 수 있었던 기초가 되었던 만화 <미생>을 그린 작가 윤태호 씨도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는 노동하는 인간의 삶, 대기업 종합상사에 다니는 사원의 삶을 그려 그늘에 가려진 존재를 부각하길 원하며 <미생>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윤태호 작가가 <한국경제신문>과의 대담 "인기 웹툰 미생' 윤태호 작가 - 대우 인터 상사맨들 생생 토크"에서 한 말을 들어보자: 

"윗사람들이 중동의 모래바람 속에서 멋있게 악수하며 계약서에 사인할 때, 이 장면을 위해 사무실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벌인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컴퓨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분들이 이 세계를 만들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거죠."

아침에 학교 갈 때, 저녁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어김없이 마주치며 지나쳤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어떻게 힘겹게 고군분투하며 사는지를 연속극 <미생>은 낙하산을 타고 "원인터내셔날 종합상사 영업 3팀"에 계약진 사원으로 떨어진 사회 초년생  장그래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길거리에 즐비한 음식점과 술집에는 왜 이리도 많은 직장인들이 모여 앉아 부어라 마셔라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차근차근 알 수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성적표가 미래를 조금이나마 더 보장해줄 수 있는 대학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면, 좋은 대학에서 쌓은 인간관계, 학업성취도를 포함한 다양한 자격증과 외국어 능력 평가 시험 성적은 보다 나은 삶을 보장해 주는 길이 된다고 믿으며 자랐다. 그건 착각이고 환상이었다. 미래를 조금이나마 보장해 주는 대학에 들어간 이는 곧바로 새로운 출발선 뒤에 불공평한 순서로 누군가의 앞에, 누군가의 뒤에 서있는 자기를 발견한다. 그런 대학이란 현실을 담담하고 받아들인 후 4년 간 쉬지 않고 달린 덕에 대기업에 들어간다면, 그 순간부터 삶은 바뀔 거 같다. 첫 출근날 또 다른 새로운 출발선 뒤에 불공평한 순서로 누군가의 앞에, 누군가의 뒤에 서 있는 자기를 다시 발견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까지는 꿈을 꿀 수 있다. 


'원인터내셔날 종합상사'에 낙하산을 타고 떨어진 장그래는 누구나 한 번쯤 어떻게 해서든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아 금이 간 채 마음에 내려앉은 꿈을 떠올리게 한다. 난 못했지만, 너라도 해내라는 응원 어린 시선은 사실 우리 자신을 향한 응원이다. 장그래의 우왕좌왕 속 고군분투는 오랫동안 잊어버린 채 살아온 나 자신의 본래 모습을 끄집어낸다. 바둑판 위에서 배워온 세상과 종합상사에서 온 몸을 부딪히며 견뎌내는 세상 사이에서 건져 올린 장그래의 깨달음과 다짐은 어느새 타성에 젖어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는 우리에게 주지스님의 손에 들린 죽도가 되어 절도 있게 어깨를 내려친다. 일상의 진중함. 평범한 일상의 알 수 없었던 무게를 느끼는 순간이다. 이상을 이룰 수 없었기에 현실에 안주했고, 현실에 안주하는 게 못마땅해 타성과 습관에 내 몸과 마음을 모두 내준 채 살았다. 현실 도피는 결국 그 옛날 우리가 마음에 새겼던 이상으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에 가능한 방어기제였다. 일상의 진중함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 놓인 이유를 알 수 없는 무게에 관한 깨달음은 현실 속에 실은 우리의 이상이 숨겨져 있었고, 이상은 현실의 매 순간이란 조각을 하나씩 끼워 맞출 때만 일상이 된다는 걸 장그래는 바둑과 현실을 하나로 묶는 자아실현이란 연금술을 수련하며 우리에게 보여준다.  


"다시 길이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다."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표어를 내걸고 1990년대에 정보화 산업 육성에 집중했다. 그 성과는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도 끊어짐 없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산업 기반 조성으로 이어졌다. 2년 전 2019년, 13년 만에 돌아간 한국 사회는 낯설었다. '과도하게' 정보화한 사회는 한국인을 '과도하게' 자폐증적으로 개조했다. 지하철과 버스에서 마주친 사람은 열에 여덟 손전화기 속에 들어가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피곤에 지쳐 어디론가 이동하는 시간을 활용하여 쪽잠을 자고 있었다. 바둑판을 벗어나 새로운 현실로 뛰어든 장그래의 모습에서 난 정보화 사회로 던져진 정보화된 인간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서는 법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다른 인간과 소통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힘겨운 여정을 읽었다. 바둑판에서 깨우친 인생에는 승자 혹은 패자,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손에 쥐는 것 말고 다른 가능성은 없었다. 원인터내셔날 종합상사에서 장그래는 새로운 걸음마를 시작했다.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때 깨우쳤다. 지금까지 자기 삶을 내걸었던 바둑판 역시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바둑 한 알은 수많은 다른 알들 속에 있을 때만, 수많은 다른 알들과 함께 움직이며 협동할 때만 한 알의 알로서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낙하산을 타고 하늘에서 떨어진 장그래를 인정하지 않았던 오상식 차장. 그는 장그래의 남다른 면을 발견했고, 그랬기에 장그래가 자랄 수 있는 터전이 되어 줄 수 있었다. 장그래를 통해 자기를 다시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상식 차장이 장그래에게 좋은 선생이 되어줬다면, 장그래 역시 오상식 차장에게 좋은 선생이 되어줬다. 


사랑과 증오, 부러움과 질투. 원인터내셔날 종합상사에서 장그래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가능성이자 언젠가는 넘어서야 할 벽이었다. 그래가 눈앞에 놓인 벽 하나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다시금 한 발짝 내디디면, 그 과정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래가 보여준 새로운 가능성을 자기 속에서 발견했다. 미생이 완생이 되는 과정은 '나'를 극복하여 '우리'가 되는 과정이다. 끝없이 흔들리고, 부서지고, 넘어지고. 다시 중심을 잡아 단단하게 일어서서 다른 이를 향해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 때만 '나'는 '우리' 속에 들어가 머물 수 있고, 그 순간부터 실은 태고적부터 '우리'가 '나'를 지탱했음을 알 수 있다. 장그래의 자기 발견과 자기 성장은 원인터내셔날 종합상사로 그려진 '우리' 속에서만 가능했다. 자기 성취는 성장과 성장통의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다. 연속극 <미생>은 이점에서 서양의 영웅 신화와는 다른 길을 택한다. 영웅이 된 한 개인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게 서양 신화의 도착점이라면 연속극 <미생>에 비친 한국의 영웅 신화는 '정'이라는 상호 심리적 소통을 통해 '우리'라는 공동체적 영웅을 만드는 걸 마지막 종착역으로 삼는다. 자폐 증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국사회에 연속극 <미생>은 '나'라는 개인이 살아가는 삶의 최소 단위가 자아가 아니라 '우리'임을 알려준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몰랐던 진실 한 가지, 우리. 


2022년 1월 5일에

작가의 이전글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200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