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전차 - 재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달린다
한 편의 영화에는 보통 진짜 주인공이 있고 주인공 뒤에서 나름의 개성을 뽐내며 주연을 보필하는 조연이 있기 마련이다. 한국말로는 제목이 ‘불의 전차’로 알려진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주인공을 찾아내는데 공을 들여야 한다. 주인공이 두 명이기 때문이고 이 둘의 운명이 오묘하게 얽히고설켜있기 때문이다. 하얀색 운동복을 입은 한 무리의 청년들이 이른 아침 해변을 따라 달리고 있다. 전설이 된 운동선수의 삶을 그린 영화라는 소개글 첫대목만 읽었기에 ‘영국의 한 대학교 럭비부 이야기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무리의 청년들 속에는 20대 청년으로 보이지 않는 30대 어른 몇 명이 섞여 있다. 럭비부라고 결론짓기에는 모든 선수가 달리기에 임하는 자세가 너무 진지하다. 아마도 육상부…? 옆에서, 앞에서, 뒤에서 같이 달리는 친구와 말 한마디 섞지 않는다. 오직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목구멍을 뚫고 솟구쳐 오르는 거친 자기 숨소리와 터질 듯 말 듯 오묘하게 경계선을 오가는 심장 박동 수에 집중하고 있다. 한 달음 또 한 달음. 힘들지만 또 한 번 앞으로 내닫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사용하고 있다. 바로 그 순간 마치 먼 바닷가에서 바람을 타고 온 거 같은 장엄한 음악이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한다. 단. 단단단. 단…단… 단. 단단단. 음악가 벤겔리스Vangelis가 만든 노래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가 들려오고, 캠브리지 대학교Univerity of Cambridge 육상부 선수들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앞을 향해 계속해서 달려간다. ‘아, 이 노래가 이 영화의 주제곡이었구나!’
영국계 유대인인 해롤드 아브라함스Harold Abrahams은 영국 최고 명문대 중 하나인 캠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했다. 해롤드의 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돈을 불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학교 관계자는 해롤드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1920년대에는 돈으로 돈을 버는 직업을 여전히 천한 직업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지식인이 반드시 해야 할 게 주식 투자인데, 100년 전 세상은 오늘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나 보다. 해롤드는 완벽주의자다. 유대인 피가 몸속에 흐른다는 사실만으로 선입견과 편견 속에 자기를 가두어 넣으려는 사람들에 맞서기 위해서 그는 달린다.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자기를 증명하고 싶었기에 더 빨리 달리는 자기를 만들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자기 계발에 박차를 가했다. 공부면 공부, 달리기면 달리기, 영국계 유대인은 ‘열등한’ 인간이 아니라 ‘완벽한’ 사람이란 걸 모든 사람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잉글랜드England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해롤드라면, 스코틀랜드Scotland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는 에릭 린델Eric Liddell이었다. 부모님이 중국 선교사였기에 에릭은 중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해롤드랑 다르게 에릭은 뛰어난 신체 능력을 타고났다. 남들보다 유달리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두 다리를 에릭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라고 믿었고, 그에게 달리기는 무당이 신과 교섭하는 굿과 비슷했다. 달릴 때마다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아드레날린 과다분비 현상은 그를 황홀경으로 안내했다. 에릭은 달리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원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는 달렸다.
에릭과 해롤드는 한 지역구 100미터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리는 에릭의 압승이었다.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고 행복감에 사로잡혀 결승선을 먼저 통과하는 에릭의 모습은 해롤드에게 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단 하루도 채찍질을 멈출 수 없는 자기 계발의 고통을 에릭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더 이상 더 빨라질 수 없다고 판단한 해롤드는 이탈리아-아랍계 영국인인 육상 선생 샘 무사비니Sam Mussabini를 찾아간다. 이탈리아-아랍의 피가 몸에 흐르는 샘은 해롤드처럼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육상 협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서 살아갈 수가 없었다. 인종차별. 백인과 흑인 사이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차별의 기저에 놓은 편견과 선입견이 생물학적 기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한 가지 차별이 존재하는 곳에는 그것과는 성격과 양태가 다른 차별이 도처에 숨어 있음도 알아야 한다. 해롤드와 샘은 멸시와 차별이란 공통분모로 하나가 되어 1924년 올림픽을 준비를 시작한다. 에릭은 선교 활동과 달리기를 오가며 바쁘게 살았다. 그 또한 1924년 올림픽 육상 시합에 출전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금메달을 따는 걸 목표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두 가지 일을 오가는 그의 모습을 누구보다 염려했던 여동생 제니 리델Jennie Liddell은 달리기를 포기하고 자기와 함께 중국으로 선교하러 가지고 종용한다. 그때 에릭은 달리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 중국으로 가겠다고 대답한다.
에릭과 해롤드는 둘 다 1924년 올림픽 영국 육상대회 국가대표선수단에 뽑혀 프랑스로 향하는 배에 오르는데, 그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100미터 달리기 시합날이 일요일이었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며 살아온 에릭은 달리기와 신앙 중 한 가지를 택해야 할 상황에 처한다. 그리 오래 머뭇거리지 않았다. 에릭은 신앙을 지키기로 결심한 후 올림픽 시합 기권 의사를 영국 육상협회 책임자에게 알렸다. 나가기만 하면 우승이 따놓은 당상인 에릭의 출전 거부 의사를 들은 협회 의원은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해결책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아주 복잡해질 수도 있었던 에릭의 출전 거부 선언은 한 친구의 배려로 쉽게 해결된다. 자신의 종목인 400미터 시합이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있으니 자기 대신 에릭이 나갈 수 있게 선수 명단을 교체해 달라는 요구가 들어왔다. 이로 인해 해롤드는 100미터 달리기 시합에 참가하고 에릭은 400미터 달리기 시합에 참가하기로 계획인 변경된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해롤드는 100미터 달리기에서 금메달을, 에릭은 400미터 달리기에서 금메달을 땄다. 에릭의 친구도 한 종목에서 메달을 딴다. 고국으로 돌아온 해롤드는 육상 선수 생활을 계속하여 육상 지도자로 삶을 마감했다. 에릭은 여동생과 함께 선교사로 중국으로 떠났고, 중국에서 삶을 마감했다. 이 두 사람에게 달리기는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한 명은 자기 계발로, 다른 한 명은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을 위해.
영화가 끝나면 신기하게도 영화의 첫 장면이 다시 반복한다. 우리 인생을 달리기로 생각할 때, 첫 장면으로 영화를 끝내는 감독의 통찰에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인생이 달리기라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달리기고 마지막 일 역시 달리기다. 하지만, 영화의 첫 장면 속에서 대충 보고 넘겼던 얼굴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해변가를 달리는 젊은이들 속에서 에릭과 해롤드, 이들의 친구들이 섞여 있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달리기 그 자체였다.
세계 신기록, 올림픽 금메달, 세계 육상 대회 우승자는 화려한 조명을 즐길 수 있고, 이를 통해 먹고살 걱정을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는 특권을 손에 쥔다. 하지만, 1924년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은 그다지 특별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기를 철저하게 다스리며 더 나은 달리기 선수가 되기 위해 채찍질했다. 자기를 증명하기 위했고, 자기보다 더 큰 목적과 의미를 세상에 알리길 원했고, 자기를 극복하길 원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그들의 삶은 자만보다는 겸허함이, 열광보다는 차분함이, 성공보다는 자기 극복이 더 추구할 가치 있는 대상이라고 말하는 거 같다.
“힘들지? 그래도 달려. 그러다 보면 네가 원하는 곳에 가 있을 거야.”
에릭과 해롤드는 그렇게 내게 말한 후 해변에서 사라졌다.
2023.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