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평범한, 그래서 너무도 범상한, 진주에 사는 한 어른의 삶
한평생 대체 얼마를 주변 사람과 사회, 국가에 기부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린 그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 그런 사람이 다른 나라가 아닌 한국 진주에 살고 있다. 내 부모님과 나이가 같은 44년생 김장하 할아버지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19살에 한약제조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남산당 한약방을 개업하여 2022년까지 약 60년간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한약을 만들어 주며 돈을 벌었다. 그 당시에 서민에게는 문턱이 높았던 한약을 저렴한 값에 제공하기 위해 박리다매를 판매 전략을 사용했다. 고통으로 허덕이는 이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먹고 산는 자기를 직시한 그는 그렇게 번 돈을 함부로 헛되게 사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한약방에서 일하는 직원이 한때 18-19명에 달했고, 하루에 한약 800첩을 제조할 만큼 장사는 잘되었다. 다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으로 모셔야 할 거 같은 할아버지가 앉아 있어야 할 한약방에 19살 청년이 앉아 있었지만,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했고 그가 제조한 약의 효능이 좋았기에 19살 청년 김장하가 차린 한약방은 새벽부터 찾아온 손님으로 북적거려 주변 상권만이 아니라 주변 한약방의 판매 수입까지 보장해줬다.
“옛날에는 약값을 기술료라고 해서 엄청 많이 받았거든. 나는 기술료보다는 수가를 줄이겠다. 내가 돈을 벌었다면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돈을 벌었다. 다른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내가 그 돈을 가지고 호위호식할 수 있었고 방탕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어가지고 차곡차곡 모아가지고 사회로 환원하기로 해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민주주의를 한국 땅에 심기 위해 노력했던 진주신문을 10년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지원했다. 극단 <현장>이 연습실과 공연을 함께 할 수 있는 거처(소극장)를 마련하는데 마중물이 된 삼천 만원을 조건 없이 지원했다. 누구의 묘인지도 알 수 없이 방치된 묘 하나가 형평운동가 강상호 선생님의 묘라는 걸 알게 되자 소리 없이 자금을 지원하여 묘비를 만들어 세웠다. 진주가족폭력상담소 설립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돈이 필요한 이가 찾아올 때를 대비해 항상 돈이 담긴 흰 봉투를 서랍 속에 준비하고 있었다. 명덕신민(明德新民: 내 마음의 밝은 덕을 밝혀 참된 나를 찾아 가정과 나라, 세상을 복되게 한다)을 창립 이념으로 삼고 1984년에 명신고등학교를 세워 1991년에 학교 및 일체 부설 기관을 국가에 기증했다. 남산당 장학재단을 세워 돈이 없어서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려는 학생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지원했다. 도대체 몇 명의 학생이 김장하 장학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았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대략 1,000명 정도 될 거라는 짐작이 있다. 문형배 헌법재판관도 김장하 할아버지가 공부할 수 있도록 도운 학생 중 한 명이었는데, 김장하 할아버지를 위해 몰래 준비한 생일잔치에서 축하사를 전하는 중 눈시울을 붉히는 장면이 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러 김장하 할아버지를 찾아갔더니, 김장하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아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진주를 찾았을 때, 따로 시간을 내어 김장하 할아버지를 찾아가 만났지만, 언론 어디에서도 이를 화제로 삼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김장하 할아버지가 대접한 차는 ‘다방 커피’였다. 대통령 당선 후 김장하 할아버지를 청와대로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옆에서 그를 지켰던 문재인 전 대통령 역시 김장하 할아버지를 조심스레 찾아가 만났다. 두 사람의 만남 역시 어느 언론사에서도 화제로 삼지 않았다. 그만큼 비밀리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이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걸 부단히 노력하며 피했던 김장하 할아버지의 마음을 두 전 대통령이 알아줬기 때문이었다. 50분간 김장하 할아버지를 만난 후 남산당 한약방을 나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했다:
“참 좋은 분을 만났네. 정말 좋은 분이다 정치인을 만나 훈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다.”
기인인가? 기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평범한 사람이다. 스님인가? 스님이 되어 해탈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찰나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말 짧디 짧은 삶을 가지고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만 하는지를 너무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신인가? 신이 되기에 너무도 인간적이면서 너무도 ‘무식’하고 고집스럽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길을 올곧게 걸어온 사람이다. 어느 모임에 가든지 항상 끄트머리에 앉았던 그는 일정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를 기다리는 손님이 있는 한약방으로 돌아갔다. 그 자리에 참석한 이가 누구인지, 그 자리가 미래의 자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는 일절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어른. 기록 영화의 제목처럼 김장하 할아버지는 어른이다. ‘어른’이란 단어는 원래 ‘나이를 먹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른’은 얼우다라는 동사에 접미사ㄴ이 결합한 ‘얼운’이 변형된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몸을 합한다’란 뜻을 품고 있는 ‘얼운’은 ‘어른’이 되면서 ‘몸과 마음이 성숙해 사랑할 자유를 가지고 동시에 그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어른 김장하. 김장하 할아버지의 삶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낼 수 있는 훌륭한 제목이다. 풍요 속의 빈곤과 상대적 박탈감으로 허덕이는 난 도대체 무엇이 김장하 할아버지로 하여금 모두가 한 번쯤 스쳐 지나가는 바람으로 마음에 품어봤을 듯한 꿈을 꾸게 했고 작심삼일이 아닌 60년간 이를 지곳해서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만들었는지가 궁금했다. 나름의 실마리는 1991년 8월 명신 고등학교를 국가에 기부하는 날 행한 이사장 퇴임사에 기록되어 있었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교가 공곡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절차를 밟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2022년 어느 날 60년간 운영했던 남산당 한약방 문을 닫는 날 불현듯 찾아온 김장하 장학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았던 한 남자가 말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런 그가 마음에서 잊히지 않았던 김장하 할아버지는 누군가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를 묻자 대답했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겁니다.”
김주완 기자가 김지현 피디와 차선영 작가와 손을 잡고 만든 기록영화 <어른 김영하>가 세상에 나왔기에 김장하 할아버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기록영화에 담긴 그의 행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주완 기자는 이렇게 쉽게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는 말로 제작 과정을 정리했다. 김장하 할아버지의 행적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기록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만 전하면 너도나도 앞장서서 인터뷰에 응해줬기 때문이다. 김장하 할아버지는 ‘평범한’ 사람들을 키우는 일에 한평생 노력했다. 그래서 그의 삶을 옆에서 지켜본 이들, 먼발치에서 살핀 이들, 다른 이를 통해 그를 알게 된 이들, 직접 그를 만났고 그로부터 도움을 얻은 이들은 한 ‘평범한’ 인간의 ‘비범한’ 삶이 망각되지 않기를 바라고 앞다투어 인터뷰에 응해줬다.
말만 앞서는 한 명의 종교 지도자인 나에게 그가 살아낸 삶은 그 자체가 큰 충격이었다. <어른 김장하>를 같이 감상한 아내는 긴 울림이 쉽게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매주일 심금을 울리는 한마디 말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는 나에게 그는 한순간 고양된 감정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사실 지극히 미약하다는 진리를 내 책상 앞에 내려놓은 후 ‘아장아장 사뿐사뿐’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며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들먹이며 김장하란 인간의 삶에 종교적 색채를 덧입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가 직접 삶으로 보여준 발끝으로 만든 삶과 뇌세포에 전기 충격을 가해 하늘에 그른 삶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사이만큼 큰 차이가 있음을 알기에 자제함이 마땅하다. 그래서 김장하 할아버지의 초등학교 동창이면서 70년 지기 최관경 부산교육대 교육학과 명예교수는 말 또한 오랫동안 내 마음을 흔들고 있다:
“이 친구의 삶이 부럽지 않다… 저렇게 살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2024.01.14.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