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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암 Dec 18. 2020

나가고 싶지만 오늘은 참을게요.

크로플, 2020-11-29

코로나 19가 생활 방식을 송두리째 바꾼 올해, 그래도 여기 단양은 1년 가까이 나름 청정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 질병이 전국적인 확산세를 보일 때에도 지역적으로는 확진자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충북의 한쪽 귀퉁이 작디작은 마을도 최근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차로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제천에서 일주일 사이 확진자가 100명 가까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한 가족의 김장 모임에서 시작된 의도치 않은 전파는 요양병원, 학교, 이웃에게 퍼져 결국 작은 지방도시가 마비될 정도의 상황에 치달았고, 그로 인해 나와 아내도 주말에 집에서 꼼짝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반면, 뱃속 아기 때문에 요즘 아내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나 또한 같은 시간에 자다 보니 매일 새벽 6시면 눈이 떠지는 바람에 주말의 하루는 더없이 길어졌다. 아침부터 넷**스에서 영화나 즐겨보는 TV 시리즈까지 몇 편 챙겨봤지만, 여전히 해는 하늘 높이 떠있었고 연속된 영상 시청으로 인한 피로감은 한껏 쌓였다. 그러던 중 아내가 주문한 무언가가 택배로 집 앞에 도착해 있음을 알았다.


하얀 스티로폼 상자를 열어보니 아직도 꽁꽁 얼어있는 아이스팩이 위아래로 깔려있었고, 포장지를 꺼내어 읽어보니 크로와상 반죽이었다. '우리 집엔 오븐이 없는데, 빵 반죽은 왜 샀을까?' 덜컹덜컹, 아내는 귀엽게 조금 부풀어 오른 배를 감싸고 수납장 안에서 한동안 사용하지 않은 와플 기계를 꺼냈다. '이번 주에 장 볼 땐 와플 반죽을 안 샀는데 와플 기계는 왜 꺼낼까?' 하나부터 열까지 의문을 남기는 행동만 할 뿐이었다.


아내는 힘겹게 수납장 깊은 곳에서 꺼낸 와플 기계를 예열하면서 와플기의 윗면과 아랫면에 가볍게 버터를 발랐다. 차가운 노란색 고체덩어리는 고소한 냄새를 퍼뜨리며 뜨거운 철판에서 작은 기포를 일으켰다. 그리곤 내가 흔히 알고 있는 크로와상과 생김새가 똑같지만, 1/5 정도 되는 크기의 밀가루 반죽을 와플 기계 사이에 살짝 올려두었다. 나는 이때 반죽 상태의 크로와상을 난생처음 보았다. 물론 다른 빵 반죽도 아직 본 적은 없다. 그다음엔 힘껏 뚜껑을 닫고 몇 초간 꾹 눌러주었다. 엄청난 압력을 견디고 결국 다이아몬드가 탄생하는 것처럼, 작은 크로와상 반죽은 와플 기계의 열기와 압력을 견디며 아내가 목적한 노릇노릇한 그 무엇이 되고 있었다. 끝으로 뚜껑을 열어내니, 당장에 한입 집어먹고 싶은 와플이 모습을 드러냈다. 흡사 마트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모 제과의 와플 모양 과자 같은 크기와 생김새였다. 아내는 몇 번 신이 나서 같은 작업을 반복하더니 어느새 5개의 크로플이 만들어졌고, 그중 실수로 못생기게 태어난 크로플 하나를 플레이팅 하기 전에 즉석 해서 맛을 보여주었다. 아무것도 뿌리거나 바르지 않아도 태생이 버터와 함께였던 그 반죽은 더할 나위 없이 고소했다. 그런 아이를 앞에 두고, 아내가 요리만큼이나 좋아하는 플레이팅을 기다릴 수 있을까? '응, 기다려야지.' 아내가 식탁 위에 올릴 마음에 드는 접시를 골랐다. 메인이 되는 크로플을 접시 위에 올리고 블루베리와 딸기 같은 냉장고에 있던 과일과 메이플 시럽을 와플 위에 올렸다. 뜨끈한 뚝배기 해장국 한 그릇보다 비싸게 카페에서 팔고 있는 그럴싸한 디저트, 크로플을 금세 만들고 접시에 담아냈다.


태생이 고소한 이 디저트에 와플 기계로 따뜻한 열기를 더했고, 와플 하면 떠오르는 메이플 시럽으로 단맛을 내었다. 그 와중에 오랫동안 우리 집 냉동실에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냉동 블루베리의 시원한 맛이 더해졌고, 얼마 전 입덧을 하던 아내가 먹고 싶어 했던 갓 출하한 하우스 딸기가 천연덕스럽게 한 겨울에 봄의 달콤함을 뿜어냈다. 무료한 일요일 오후를 완벽히 제압하는 디저트였다. 중간즘 먹었을까? 블루베리가 입과 이에 물들어 보라색으로 변했다. 우리는 자기 얼굴은 생각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며 블루베리 때문에 물든 서로의 입술을 바라보며 어린아처럼 웃었다. 비록 근사한 카페에 들러서 남이 해주는 맛있는 디저트를 먹는 건 아니지만, 온전히 우리 부부만을 위한 식탁에 앉아 이렇게 알콩달콩 직접 만든 디저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역시나 나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선택이 우리 부부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지금처럼 강제되는 최악의 순간이 얼른 끝나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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