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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암 Nov 13. 2020

비가 쏟아지던 월요일 저녁

냉동삼겹살이 들어간 두부김치, 20-05-18

우리 부부는 아침잠이 많고, 점심을 각자 회사에서 먹고, 저녁도 종종 여러 가지 이유로 밖에서 사 먹을 때가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집 냉장고 식재료는 자주 유통기한을 넘긴다. 엄청난 할인율로 세일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냉동삼겹살을 생애 처음 구매한 것은 이런 생활습관을 충분히 고려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웬걸 집에서 먹어 보니 영 우리가 원하는 맛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가격은 웬만해선 거짓말을 하지 않나 보다. 그렇게 남은 냉동삼겹살은 본래 이름과 어울리게 마트 냉동실을 떠나 다시금 우리 집 냉동실에서 성애와 뒤엉켜 한 몸이 되고 있었다. 


그렇게 냉동삼겹살이 잊혀갈때즘, 다시 마트를 찾은 어느 날. 뽀얀  빛깔과 보들보들 말랑한 촉감에 이끌려 덜컥 두부를 샀다. 곱상한 생김새만큼이나 유통기한도 짧은 식재료였지만, 된장찌개, 두부전 등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는 재료이기에 제때에 먹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파도처럼 쉼 없이 밀려오는 일상은 우리를 해변에 표류한 난파선의 선원들처럼, 매일 거실 바닥에 나란히 뉘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이런 날엔 생존을 위한 간편식을 먹었고, 냉장고 한편을 조용히 지키고 있는 두부의 시간은 간편식과 함께 표류한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끝을 향해 달렸다. 


월요일은 참 출근하지 싫은 날이지만, 막상 퇴근하면 온전하게 잘 보낸 주말 덕에 다른 날 보다 컨디션이 좋다. 그런 까닭에 마음잡고 요리를 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때마침, 퇴근 시간 즘에 투둑 투둑 떨어지던 봄비가 퇴근길에는 차창을 세차게 때리며 여름 소나기 못지않게 천둥 번개가 몰아 치더니 억수같이 쏟아졌다. 작은 삼단 우산 속에 큰 몸을 구겨 넣고 집으로 갈 지하철로 향하다가, 친구들의 카톡 한통에 학교 앞 작은 막걸리 집으로 발길을 돌리곤 했던 대학시절의 비 오는 어느 날이 떠오르는 날씨였다. 날씨와 음악은 특정한 어느 날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는가 보다. 나는 문득 끝을 향해 달리는 두부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삼겹살로 두부김치를 만들자. 퇴근길에 그렇게 생각했다.


고기 굽는 냄새는 유난히 잘 빠지지 않는 터라, 제일 먼저, 거실과 주방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거세게 내리던 비는 잠깐 지쳤는지 추적추적 소리를 내며 봄비다운 느낌을 내고 있었다. 냉동삼겹살을 꺼내 프라이팬에 올렸다. '왜 우리는 냉동삼겹살로 태어났을까' 하며 서로 원망하는 듯 엉겨 붙은 것을 떼어내며 구웠다. 그 집착의 정도가 심해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것들은 그냥 그대로 올렸다. 엄밀히 말하면 해동에 가까웠다. 빗소리와 삼겹살 굽는 소리가 제법 화음이 맞았다. 삼겹살이 어느덧 살살 녹아 회색 빛으로 변할 때쯤, 장모님께서 주신 잘 익은 묵은지와 아내가 옆에서 열심히 썰어 놓은 양파와 다진 마늘을 넣었다. 간장으로 간을 하고, 물엿과 설탕으로 단맛을 추가했다. 연이어 아내는 찬장에서 덥석 참기름을 잡았고, 나는 '돼지기름이 이렇게 많은데' 하며 큰소리로 말렸지만 나만 믿어보라며 싱긋 웃는 아내는 참기름을 넣었다. 얼마 전부터 참기름에 대한 신뢰가 과하다. 손목이 뻐근해지면서 프라이팬 안에 양념이 졸아들 때까지 볶다가 가스레인지를 껐다. 일단 모양은 합격이다. 아내는 고기가 익을 동안 살짝 데쳐둔 두부를 썰어 기다란 접시에 깔았고, 둥근 접시에 김치와 함께 볶은 고기와 채소를 예쁘게 담아 깨를 솔솔 뿌렸다. 장모님께서 주신 동치미는 각자의 국그릇에 옮겨 담았다. 


아내가 접시에 요리를 예쁘게 담는 동안, 나는 우산을 받쳐 들고 조금 덜어 놓은 두부김치를 이웃집에 나눠주러 갔다. 지난 금요일에도 거실 바닥에 표류해있던 우리 부부에게 김밥을 나눠준 집이다. "아직 두부가 따뜻하네요? 잘 먹을게요"하는 작은 미소에 내 마음도 편해졌다. 친구와 빗속에 막걸리 집을 찾아가던 이십 대의 기억처럼, 삼십 대의 오늘의 기억도 10년 후에 비 오는 날과 두부김치에 관한 기억으로 남겠지? 하며 문득 감상에 젖었다.


토닥토닥 떨어지는 빗소리 속에서 밀려오는 첫 번째 파도를 견딘 우리 부부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했다. 그것 자체만으로는 맛이 없어서 도저히 먹기 힘들었던 냉동삼겹살도, 김치와 각종 양념과 어우러져 엄연한 요리로 탄생했다. 냉동삼겹살도 어느덧 자신이 고기임을 식감으로 여실 없이 뽐냈다. 두부김치는 월요일을 위로해주는 맛이었고, 짭조름한 김치와 고소한 두부가 불쌍하게 잊혀 가던 냉동삼겹살을 함께 위로하는 맛이었으며,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는 이날을 또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맛이었다. 그렇게 봄비가 보슬보슬 흩날리던  저녁에 우리 부부는 소박하고도 소중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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