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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에 홀리다 Jan 18. 2020

미국의 아름다운 길, 유타 12번 도로(1)

하얀 풍경화(National Scenic Byway 12)

유타의 아름다운 도로 12번은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곳이다. 봄에는 야생화로, 여름에는 푸르른 신록으로, 가을에는 아스펜 단풍으로, 그리고 겨울에는 나목과 설경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12번 길을 가는 동안 이 길에 연결되어 있는 트레일, 협곡, 폭포, 계곡과 심지어 아름다운 호수까지 이들만 둘러보는 데도 몇 날 며칠이 걸릴 만큼  보고 즐길 꺼리가 많은 곳이다. 그동안 여행을 하며 사계절 모두 볼 수는 있었지만, 눈 내린 풍경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과연 어떤 모습일지 자못 기대가 크다.  


브라이스 캐니언 국립공원을 나와 12번 길을 만나면 우회전하면서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너른 벌을 지나 처음 몇 마일은 브라이스 자락을 에둘러 가는 길이므로 가는 동안 언뜻언뜻 붉은 빛깔이 배어 나온다. 산등성이마다 나무마다 쌓인 눈이 반갑게 맞아주는 길을 가노라면 평상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전혀 새로운 길을 만난다.


'눈'은 참 경이로운 자연현상 가운데 하나다. 비가 내리면 촉촉해진 대지에 뿌리내린 생명들의 환호가 들린다. 아직 채 뿌리내리지 못한 생명들의 치열한 싸움도 눈에 선하다. 여기저기에 터 잡은 갖은 생명체들의 생명활동을 위한 자양분이라는 면에서 비 또한 신비로운 자연현상임에는 틀림없지만, 감각의 틀에서는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는 그다지 신비롭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눈은 좀 다르다. 녹아 대지로 스미기 전까지 형태와 빛깔을 가지고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덮고 있는 대상을 평소와는 달리 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심지어 평소의 모습을 미화해서 온갖 것들을 예쁘거나 아름답게 보이게 만든다. 당연하게도 모시 케이브 트레일은 막혔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도 눈 쌓인 모습은 너무 예쁘다. 평소엔 눈에 띄지도 않던 나무들,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눈에 덮이니 그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모시 케이브(Mossy Cave) 트레일 헤드의 정경, 트레일은 막혔다.


설경은 어디를 봐도 그냥 좋다. 그저 평범했던 농촌 풍경이 하룻밤 사이 아름다운 한 폭의 동양화처럼 고즈넉한 풍경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자동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가끔씩 길가에 차를 대 보지만, 그것도 잠시 모든 풍경을 다 담아갈 수는 없으니 아쉬움만 커진다. 몇 시간이라도 한 곳에 머물며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마다 쌓인 눈송이들을 보며 눈인사라도 나눈다면 좋으련만.


천천히 운전하면서 모두 눈에 담아 가리라 생각하고 눈을 부라려본다. 그러다 넘치면 잠시 서서 사진에 담고, 서서히 가면서 머리에도 담고, 그들이 풍기는 고요하고 은은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한다. 지나온 자국이 선명한 도로를 보며 여전히 내리는 눈이 얼마나 쌓일지 마음 한편으로 걱정이 되기도 한다. 제설차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제설제를 뿌려놓았는지 어느 만큼까지는 눈이 녹아있어 길을 가는데 큰 지장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아무래도 기온이 낮아지고 눈이 계속 오는 것을 보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스노 체인을 채워야 할까?"


언덕을 오르내리며 어떤 곳은 눈이 덜 쌓여있고, 또 어떤 곳은 상당히 많이 쌓였다. 길이 미끄럽지는 않아 아직은 갈만 하지만, 눈길 경험이 적은 캘리포니아 사람이라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방금 지나온 트럭이 길에 차를 세우고 스노 체인을 채우는 모습을 보니 더 불안해진다. 그것도 잠시 지금까지 잘 왔으니 그 관성으로 계속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니, 저 아래 지나온 길에 타이어 자국이 선명하다


길은 어느새 에스칼란테 시(City of Escalante)를 지나고 있었고, 그즈음부터 길에 쌓인 눈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운전이 훨씬 수월해졌다. 아무래도 도시 구간이다 보니 제설에 좀 더 신경을 썼던 모양이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캘프 크릭 캠프 그라운드가 나오고, 그곳에서 시작하는 트레일이 '로우어 캘프 크릭 폭포'트레일이다.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왕복 약 6마일의 짧은 트레일로 폭포가 아름답기로 이름나 있다. 지나는 길에 캠프 그라운드에 잠시 들러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눈이 많은 유타 사람들은 이 정도의 눈에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지, 트레일 헤드에는 십여 대의 차가 주차돼 있었고, 아침 일찍 출발해 트레일을 마친 팀들은 피크닉 테이블에 모여 앉아 간식을 먹고 있었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이곳은 잠시 나온 햇살에 녹은 눈으로 길이 질퍽했지만 크릭을 메운 햇살로 따스한 온기로 가득했다. 아슬아슬한 눈길을 지나느라 긴장하고 초조했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봄눈 녹듯 녹아내린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캠프 그라운드를 나와 조금 더 가면 캘프 크릭 뷰포인트가 있다. 이곳은 지날 때마다 꼭 들렀다 갈 정도로 경치가 좋다. 사방팔방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깊숙한 캘프 크릭을 한눈에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멀리는 '에스칼란테', 날이 좋으면 '그랜드 스테어 케이스'까지, 동으로는 '보울더'의 널찍한 들판과 '딕시 국유림'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이곳은 관광버스들도 잠깐씩 섰다 갈 만큼 전망이 좋고 아름다운 곳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방금 지나온 캘프 크릭의 깊은 골짜기와 저 멀리 그랜드 스테어 케이스, 보울더까지 볼 수 있다


보울더(City of Boulder)는 캘프 크릭에서 20여분 가면 나오는 또 다른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전에 소개했던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의 오지 가운데 하나인 '버 트레일(Burr Trail)'이 시작하는 곳이며, 또한 딕시 국유림(Dixie National Forest) 구역으로 들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 말은 두 가지를 뜻하기도 한다. 하나는 이 구간에는 아스펜(Aspen) 나무가 많은 지역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여기부터는 숲이기 때문에 눈이 많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을 가을에 오면 환상적인 단풍을 만날 수 있고, 겨울에 눈이 없으면 잎이 다 떨어진 아스펜 나무들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눈이 내리면 이번에 소개하는 것과 같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보울더부터는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는 양상이 많이 달라진다. 숲 속에 난 길이라서 눈도 더 많고 풍경도 다르다.


눈이 올 때 이 구간을 지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별 다른 생각 없이 들어섰다. 지금까지 지나온 풍경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설경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번을 가다 서다를 되풀이하면서 사진을 찍었지만, 아쉽게도 차를 세울만한 적절한 공간이 없어 도로 중간에 차를 세워야 했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다. 특별히 이 구간을 지나는 동안 때마침 눈도 그치고 간간히 푸른 하늘과 햇빛, 살랑살랑 바람도 불어줘 온산을 덮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길 옆에 솟은 아스펜 숲 사이를 지나는 겨울 여행은 여기만한 곳이 없지 않을까싶다


아스펜 단풍은 노랗다. 키가 크고 군락을 이뤄 자라기 때문에 여름에는 파란 잎들이 다른 나무들과 별 차이가 없지만, 가을에 단풍이 들면 훤칠한 키에 든 노란 단풍 숲은 장관을 이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 겨울에 잎이 지고 나면 큰 나무의 윗부분에 있는 잔가지들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기 때문에 이 또한 장관이다. 여기에 눈꽃이 피니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순백의 풍경이 온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양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무엇일까? 색채심리학에서 하양은 공정하고 결백하며 해가 없다는 의미로서 순수, 청결, 청초 또는 항복의 상징으로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아무런 색이 없어서 마치 도화지처럼 낙서라도 해야 할 듯한 설원을 보면서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하양이 주는 강력한 흡인력을 설명하는 데는 좀 모자란 느낌이다. 하양이 주는 심리적인 효과는 '투쟁심 억제'라고 한다. 여기에서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빨강이 일으키는 흥분상태, 투쟁심의 발로를 하양은 억제를 시키고 안정시켜주기 때문에 마음이 평온해지고, 고요해져 마치 오랜 세월 침묵 수행을 해온 수도자의 마음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설원에 옹기종기 모여 자라는 아스펜 나무들이 흰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이 신비롭다



>>>다음 글은 저의 단골 여행지 캐피톨 리프의 겨울 풍경과 한밤에 폭설이 내리는 길을 운전한 이야기 "길 따라 노을 따라"입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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