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친구가 사는 도시로 이사 갈 계획이다. 좀 멀리. 비행기로 14시간 정도. 지난 1월에 자기 팀에서 엔지니어를 채용한다고 같이 일했던 친구 R이 연락해왔다. 작년 여름 즈음 우리 회사 한국 오피스에서 스위스 오피스로 옮겨갔던 친구인데 같이 가자고 하더니 정말 자리가 생겼다고 연락을 해왔다. 친구가 나를 참조로 걸어서 하이어링 매니저에게 메일을 썼다.
“내가 회의에서 말했던 그 동료에요. 다시 같이 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메일을 받은 지 일주일 만에 내 스위스행이 결정됐다. 얼떨떨. 가족들과 친한 친구들한테 얘기를 전하면서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친구 따라 강남도 아니고 스위스까지 가도 되는 건가?’
솔직히 말하자면, ‘친구 따라’의 내 역사는 유구하다. 인생에서 중요한 몇 가지 결정들을 내릴 때 나는 친구의 조언을 따랐었다. 정말로 친구 따라 강남을 간 적도 있었다. 십여 년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였다. 수능 고사장에 들어갔을 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친구 C였다. 유난히 어려웠던 수리영역을 마치고 같이 점심을 먹는데 C가 울기 시작했다. 겨우 눈물을 참고 있던 나도 따라 울어 버렸다. 결과는 뻔했다. 내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성적표를 받아야 했었다.
C는 강남에 있는 M 학원 재수선행반에 들어가기로 했다고 얘기했다. 부모님께 나도 그 재수학원에 가겠다고 졸라댔다. 우리 집 형편 때문에 허락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절대 안 된다고 하던 엄마가 한밤중에 외가를 다녀오더니, 갑자기 비자금 통장을 꺼내줬다. 결과적으로 나는 재수학원이 주는 장학금까지 받으며 현역 때 목표했던 대학 보다 더 좋은 곳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재수 막바지, 수시 원서 쓸 때에도 C의 조언을 따랐었다. 나는 원래 자신 있던 과학 논술 비중이 높은 학교들에만 지원할 생각이었다. 지금과 달리 그땐 원서 개수에 제한은 없었지만 원서 비용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내 얘기를 들은 C가 한마디 했다.
“그래도 S 대학은 써봐. 사람 일 어떻게 될 줄 알고.”
고민하던 나는 원서 마감 마지막 날에 고시원 총무 컴퓨터를 빌려 S 대학에 지원서를 보냈다. 같은 날에 C 대학 논술고사도 봐야 했기 때문에, S 대학만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컴퓨터 공학과에 지원해야 했다. 결과는, S 대학 빼고 모조리 떨어졌다. C가 날 살린 것과 다름 없었다. 더불어 그렇게 얼결에 정해진 전공으로 지금까지 아쉽지 않게 밥벌이 하고 있다.
대학입시에 이어 취업에도 친구 덕을 톡톡히 봤다. 나는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 하였는데, 마지막 학기가 가까워 올수록 회의를 느꼈다. 대학원 세부전공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지만, 대졸 신입으로 취직을 하자니, 연봉 차이가 너무 컸다. 고민을 털어놨더니 과 동기인 H가 구글에서 진행하는 코딩 캠프에 참가해 보라고 링크를 보내줬다. H는 1기 캠프 멤버였는데, 캠프는 채용과 상관없었지만 프로젝트가 재밌고 무엇보다 일주일에 하루씩 당당하게 연구실을 쨀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라고 했다. 다녀보니 캠프는 예상대로 즐거웠다. 매일 실험 결과의 소수점 둘째 자리 가지고 씨름하다가 오랜만에 화면에 가득 차는 데모를 띄웠다. 금요일마다 연구실을 박차고 나와 강남에 있는 사옥으로 가기 위해 2호선에 올라타면 기분이 썩 좋았다.
캠프가 끝나갈 무렵 인턴 접수가 시작됐다. 캠프에서 알게 된 멘토가 나를 추천해 주었다. 세 번의 인턴 면접, 석 달에 걸친 인턴십, 두 번의 정직원 전환 면접을 거쳐, 내 사진이 들어간 알록달록한 정직원 출입증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세부전공과 상관없이 대졸 신입으로 입사했지만 연봉은 만족스러웠다. H가 아니었으면 억지로 세부전공을 살려 관련된 회사에 들어가야 했을 거다. 구글 면접에는 청바지를 입고 갔었다. 한 번도 입지 않은 검은색 면접 정장을 중고로 팔아버리면서 남아있던 세부전공에 대한 미련도 훌훌 털어버렸다.
뒤돌아보면 나를 인생의 다음 단계로 데려가 줬던 건 다정하고 현명한 친구들이었다. 나름 그럴싸한 내 귀납적 추론에 따르면,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건 괜찮다. 오히려 좋다. 속담이야 옛말이니까, 내 맘대로 말하자면, “친구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라고 하겠다.벌써 화상으로 새로운 스위스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 친구들은 나를 또 어디로 데려다줄까. 스위스에는 별이 많고 세금이 적다던데 대충 아무 데나 가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