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on the next level.”
나는 곧 Next Level이 된다. 승진한다는 뜻이다. 우리 회사엔 직급 대신 레벨이 있다. 레벨제는 능력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성과주의에 가깝다. Next Level이 되기 위해선 그냥 잘하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눈에 보이는 성과, 즉 신기능 출시가 있어야 한다.
나의 원래 계획은 이번이 아닌, 지난 사이클에 승진하는 거였다. 내가 지난 사이클에 했었던 프로젝트는 임팩트가 큰 연관검색어 프로젝트였었다. 설계와 구현을 모두 마치고, 여러 번의 실험을 거쳐 출시에 가까워졌을 때 광고팀이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 기능이 광고 수익에 영향을 준다고 했다. 일반적으로는 검색 기능 출시에 광고팀이 관여하지 않지만, 이번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예외였다. 나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광고 수익 지표를 열람 할 수 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임원 회의가 있었고, 출시가 취소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그날 밤 CEO에게 항의 메일을 보내는 꿈을 꾸었다.
출시된 게 하나도 없어서 지난번엔 승진 신청도 할 수 없었다. 승진하면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휴가를 쓰고 제주도 여행을 길게 다녀오고 싶었다. 운동도 다시 시작하고, 그림도 그리고, 친구들도 자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적어도 6개월은 더 승진 준비에 전념해야 했다.
연관검색어 이후 새로 맡게 된 건 Answer라고 불리는 검색결과를 바꾸는 프로젝트였다. 지난 연관검색어 프로젝트에 비해 임팩트는 아주 작았지만, 광고팀에서 관여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과정이 마냥 순탄하진 않았다. 초기 사용자 지표가 기대만큼 잘 나오지 않았다. 미국에 있는 기획자와 데이터 분석가, UX 디자이너와 함께 고민해야 할 사안이 많았다. 새벽 시간도 마다하지 않고 회의에 참석했다. 아이디어가 정리되면 최대한 빨리 구현하고 실험 결과를 공유했다. 야근을 많이 했고 저녁은 자주 인스턴트 미역죽으로 대신했다. 뻣뻣한 인스턴트 미역을 씹으며 승진만 하면 제주도에 가 흐르듯 부드러운 성게 미역국을 먹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2월 내 이름이 적힌 출시 보고서가 완성되었다. 내 이름이 적힌 약봉지들과 함께.
지난주 수요일 아침, 출근 전 카페에 들렀을 때, 매니저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방금 미팅을 잡았는데 들어올 수 있으세요?”
카페에서 부랴부랴 화상 미팅에 들어갔다.
“승진 축하드려요!”
매니저님은 카메라 앞으로 바짝 붙어 앉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카페 앞 벚나무엔 꽃이 한창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잠시 꽃구경하고 출근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미팅이 끝나자마자 짐을 싸서 회사로 향했다.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는데 승진하면 하려 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제주도는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Answer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스위스에 있는 새로운 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급한 일을 자청해서 맡았다.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승진 후에 하려던 일들이 또 ‘새 팀에 적응한 후’로 밀려났다.
사무실에 도착해 다음 레벨에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Software Engineer Ladder를 찾아봤다. 한국어로 “개발자 사다리”라는 제목을 가진 그 문서에는, 회사에서 각 레벨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게 기대하는 바가 표로 정리되어있었다. 사다리 모양 표에서 나에게 해당하는 부분을 찾아 읽었다. 문득, 이 사다리 오르기는 언제 끝나는 걸까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 때는 대학생만 되면 모든 게 완벽할 거라 생각했었다. 대학생 때는 취업하면, 승진 전에는 승진하면 다 괜찮을 것 같았다. 문득 에스파의 노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Kosmo에 닿을 때까지. Next Level.”
나의 Kosmo는 도저히 가까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