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의 아프리카 여행법 - Addis Ababa, Ethiopia
형네 집에 얹혀살며 형이 해준 밥을 먹고 지내는 내게 정해진 하루 일과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냥 형이 볼일이 있으면 따라 나가서 동네 사람들 구경하고 볼일이 끝나면 저녁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들어오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디스아바바에는 혼자 마실 나가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살 만한 예쁜 카페도, 그 커피를 한 손에 들고 걷다가 앉을 만한 아늑한 공원도 없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형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큰길을 가다가 형은 이쪽이 지름길이라며 방향타를 꺾었다. 들어선 곳은 화창한 날씨에도 뭔가 스산한 분위기를 내는 주거지역이었다. 양철로 된 지붕을 얹고 있는 집들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기 저 코너에서 불량배들이 튀어나와 우리를 벽으로 몰아세우고 가방을 뺏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가방을 앞으로 바꿔 맸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자 눈앞에 나타난 건 쪼그려 앉아 놀고 있는 동네 꼬마들이었다. 안경을 쓴 동양인 둘은 이 아이들에겐 신기한 놀 거리다. 이 녀석들은 서슴없이 다가와 우리를 보고 (비)웃는다. 우리가 그렇게 웃기게 생겼냐. 이 장난꾸러기들에게 사진을 찍어줄까 싶어 인화기를 켰다. 그런데 그새 방전이 됐는지 작동이 안 된다. 가방에서 뭔가 뒤적이는 나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기대감을 잔뜩 머금은 표정을 지으며 슈렉 고양이의 눈망울을 발사하고 있었다. 아, 하필 이럴 때 방전이라니.
말은 안 통하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어주는 것뿐이다. 그렇게 아이들 사이를 헤치고 가려는 찰나, 그중에 가장 어린, 이제 막 걷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와 나를 향해 팔을 뻗는다. 이렇게 어린아이도 벌써부터 외국인을 보면 돈을 달라고 하는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스치는 것도 잠시, 뭔가 느낌이 다르다. 설마 안아달라는 건가? 몸을 숙여 아이에게 가까이 갔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내 목을 끌어안더니 볼에 입을 맞췄다. 나는 깜짝 놀라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고 주변에 다른 아이들과 동네 어른들도 다 같이 박수를 치며 웃는다. 무방비 상태로 있는 내게 달콤한 공격을 한 방 먹인 꼬마도 역시나 웃고 있다. 어떻게 낯선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입을 맞출 수 있는 걸까. 방금 만난 아이들과 헤어지기가 이렇게 아쉽다니. 내 볼에 입을 맞춘 아이야. 그 순수함 오랫동안 간직하길 바랄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소나기가 쏟아져 교회 앞 처마 밑으로 몸을 숨겼다. 곧이어 들어오시는 한 할아버지. 우리를 보더니 다가와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미신다. 2 비르(약 120원)를 드리고는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흔쾌히 허락하시며 카메라를 향해 웃음을 지어주셨다. 할아버지가 손에 쥐고 계신 건 내가 드린 2 비르. 인화기로 사진을 뽑아드리자 기뻐 받으시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셨다.
“God Bless You.”
한참 동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 사진을 품속 깊이 넣으신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자기 사진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비가 잦아들자 가던 길을 가려던 우리에게 할아버지는 말을 걸었다.
"형, 뭐래요?"
"......돈 더 없냐고."
아, 그래. 이곳은 모든 것이 나의 기대처럼, 내 생각대로 흘러가는 곳이 아니다. 체면보다는 저녁식사가, 염치보다는 오늘 하루 벌이가 중요한 사람들의 현실을 마주 했을 때, 고작 사진 한 장과 푼돈을 쥐어주고 마음의 무거움을 잠깐이나마 덜었던 나는 죄인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아프리카에 있다는 것을.
아디스아바바에서는 도로변에 무리 지어 다니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부모도 없이 어쩜 저렇게 그냥 찻길을 건널까 볼 때마다 걱정이 든다. 그날도 한 골목에서 에티오피아 축구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을 만났다. 에티오피아에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많이들 입는데 이때가 한창 월드컵 예선을 치르는 중이라 열기가 더 뜨거운 것 같았다. 유니폼을 입고 왁자지껄 노는 아이들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봤다. 낯선 남자 둘이 다가오니 아이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신경을 끄고 하던 놀이를 계속한다. 바로 그 앞에 있는 가게에서는 한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 중 한 아이의 엄마로 보였다. 허락이라도 받아야 할 것 같았기에 아주머니께 말을 걸었다.
“이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왜?”
“뽑아주고 싶어서요.”
아주머니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다시 묻는다.
“그러니까, 왜?”
이 아주머니에게는 내가 아이들 사진을 찍어서 돈벌이를 하려는 걸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굽히지 않고 다시 대답했다.
“그냥 그러고 싶어요.”
그때까지도 아주머니는 내게서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지만 이미 아이들은 사진에 찍힌다는 사실만으로도 약간 흥분한 듯 보였다. 그 사진 들을 본인들이 갖게 될 줄은 모르고.
아이들의 사진을 찍다 보면 조금 힘든 점이 (특히 아이들이 아주 어릴 경우) 아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는 점인데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명이 모여 있어 그런지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흥분했고 다섯 아이들이 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사진은 찍지 못했다. 결국 가장 어린 꼬마 아이는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사진을 찍고 그냥 갈 줄 알았던 이 '중국' 아저씨들이 안 가고 뭔가 가방에서 꾸물꾸물 꺼내어 연결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인다. 난 이렇게 아이들로 둘러싸였을 때 한국말로 아이들에게 설명하곤 했다.
“자, 기다려봐. 이렇게 연결을 하면 말이지…. 자. 뭔가 나오지? 오~이건 네 얼굴이네. 여긴 얘 모습도 있다. 다 나왔다~”
아이들은 마치 내 말을 전부 알아듣는 양 고개를 끄덕거리고 수줍게 사진을 받는다. 그리고 먼저 받은 아이와 자기가 방금 받은 사진을 비교한다. 다 똑같은 사진이라고 말해줘도 아이들은 신이 나서 서로의 사진을 보고 시시덕거린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아주머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땡큐.”
길거리에서의 만남들. 우연이 만들어내는 인연. 모두 내가 이 두 발로 그들이 사는 땅을 밟았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이래서 여행지에서는 택시 대신 버스를, 버스 대신 두 발을 쓰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