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침 일찍 출발했다. 사실 좀 무서웠다. 산길을 계속 가야 하는데 앞에 보이는 게 없으니 한 발이 여전히 두려웠다. 두려움을 참으며 하늘을 보니 별이 쏟아졌다. 하늘에 박힌 별과 달. 힘들고 무서운 길이었다. 그런데 별을 보니, 조금 괜찮아졌다. '그래, 내가 살면서 유럽에서 이렇게 별을 많이 볼 일이 있겠어?'라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걷다 보니 해가 떴다. 뜨는 해를 보니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생겼다. 시작된 발의 고통이었다.
첫날에는 한 18km쯤 걸었을 때에 시작된 발의 통증이 오늘은 걷기 5km 지점이 되자마자 아파왔다. 그래도 괜찮았다. 모든 일은 둘째 날이 가장 힘든 법이니까. 원래 첫날은 아무것도 몰라서 덜 힘들고 셋째 날은 적응이 돼서 덜 힘들다.
하지만 둘째 날은 다르다. 아무것도 모르기엔 뭔가를 알고 있어서 두렵고 적응이 되기엔 첫날의 피로가 남아서 힘들다. 그게 둘째 날이다. 나는 언제나 둘째 날이 제일 힘들었다. 그러니까 힘든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 생각을 되뇌며 천천히 걸어갔다. 걷다가 아침을 먹으려고 바에 도착하니 어제 같은 숙소를 썼던 노부부를 만났다.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하다가 같이 출발했다. 분명 천천히 걷는 편이라고 하셨는데, 분명 나보다 30살은 많으신 분들인데 너무도 잘 걸으셨다. 결국 먼저 가시라고 말씀하시니 조용히 떠나셨다. 또 걷다가 그 부부분을 만났다. 힘들어 보이던 내가 걱정되셔서 잠깐 기다리셨단다. 그러시면서 '스틱을 빌려줄까요?'라고 물어보셨다. 차마, 그 스틱을 받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그날 일정은 나 보다 5km는 더 걸어야 하는 일정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 내가 그 스틱을 받을 수 없었다. 괜찮다고 말씀드리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먼저 출발하셨다. 그때부터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많은 비가 아니고 우산을 쓰기에 좀 애매한 정도로. 가지고 온 판초우의를 입어야 하나 고민하니 한 어르신께서 "비로 젖으니 땀으로 젖으나 똑같아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속으로 '와,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반팔을 입고 걷기로 결심했다. 사실 바람막이도 챙겼지만 좀 귀찮았다.
첫날보다는 천천히 쉬어가며 갔다. 가는 중 한 공소 앞에 순례자들이 줄을 서 있었다. 뭔가 해서 들어갔더니 한 맹인 분이 사제복을 입고 소정의 기부금을 받으시며 쎄요를 찍어주고 계셨다. 물론 맹인이시기에 혼자서는 도장을 찍으시기 힘들어 한 순례자가 도와주고 있었다. 유쾌하셨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분의 행동 하나하나가 밝고 쾌활하신 게 느껴졌다. 밝은 목소리로 외쳐주신 “부엔 까미노.” 그 말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또 길 위에서 어떤 봉사자 단체를 만났다. 봉사자 단체는 순례자들을 응원하며 쎄요도 찍어주고 팸플릿도 주고 따뜻한 차도 제공해 줬다. 또 따스하게 안으며 응원해 줬다. 그 팸플릿에는 항상 마주쳤던 노란색 화살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적혀있었다. 차분히 읽으며 길 위에서의 나를 되돌아보았다.
1시 30분쯤, 숙소에 도착했다. 씻고 정리하고 밥을 먹으러 나갔다. 그날 처음으로 순례자 메뉴를 먹었다. 오믈렛이 맛있었다. 밥을 먹고 다시 숙소로 들어갔다. 당시 숙소가 마을의 출구에 가까운 쪽에 있어서 어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성당에 가고 싶었다. 한참을 누워있다가 성당으로 출발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김에 팔레스 데 레이에 예쁜 쎄요를 찍어주는 곳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도 가서 야무지게 쎄요를 찍었다.
그리고 성당에 도착했다. 작은 성당이었다.
성당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가득했다. 어제와 달리 동양인은 나뿐이었다. 유럽은 한국보다 천주교 신자들이 신실해서 무릎을 한 번 꿇고 성전에 들어가고 성체를 모셨다. 한국과는 달랐다. 한국과는 다른 성당문화를 흥미롭게 관찰했다.
미사를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던 미사 양식도 스페인어로 들으니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미사 앱을 다운로드하고 미사를 보기 시작했다. 미사가 끝날 때쯤 신부님
이 성도들을 보며 너희들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어보며 각 국가나 도시를 선창하셨다. 그러면 성도들은 자신의 도시나 국가가 나오면 호응을 하며 즐거워했다. 아까 말하지 않았던가? 여기에 동양인이 나뿐이었다. 그걸 알고 있던 옆에 있던 스페니쉬가 "Where are you from?"이라고 물어봤다. "Korea"라고 대답하니 스페니쉬가 내 손을 잡고 "Korea!!"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모두 웃으며 호응해 줬다. 사실 조금은 민망했지만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그 스페니쉬가 미사가 끝나고 하이파이브를 하며 반가웠다고 인사해 줬다. 길 가다 그분을 종종 마주쳤는데 나를 보고 "Korea?"라고 서로를 알아봤다. 미사가 다 끝나고는 "여러분을 위한 공연이 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보니 이 성당을 다니는 분들이 모여서 공연을 해주셨다. 물론 가사는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부엔까미노'를 계속해서 외치는 것을 보아 순례길을 응원하는 공연 같았다. 나를 향한 축복의 노래를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지 뭉클했다.
미사가 끝나고는 여기 주민들이 하시는 공연을 구경하며 광장에 앉아있었다. 다들 술을 마시면서 구경하지만 나는 술을 못 마시는 관계로 납작 복숭아를 먹으며. 살랑거리는 바람, 따뜻한 햇빛, 조금은 서늘한 날씨, 지고 있는 노을. 모든 것을 느끼며 '아, 이거 즐기려고 유럽까지 왔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장에서, 유럽의 복숭아를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 어느 날보다 달았던 복숭아였다.
ps) 새벽에 길을 걷고 있는데 차가 길을 막고 있어서 엄청 쫄았음. 그래서 잠깐 쳐다보기 있으니 좌판을 꺼내서 깔기 시작했음. 안심하고 갈 길을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