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스미다.

by 이나라



올해 초, 한 여자대학의 공예과를 졸업했다. 외부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가끔 전공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될 때가 있었는데 공예과라는 대답에는 대부분 도자기를 떠올리곤 했다. 섬유 공예과라고 해도 무엇을 배우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힘들 때가 많았다. '저는 직기를 이용해서 직물과 패턴을 짜고, 수편기로 편물을 짜며 가끔 염색도 하고 아, 한참 유행했던 원데이 클래스 타피스트리 아시죠? 그거의 고급 버전이라고 보시면 돼요'라고 말하기엔 너무 과한 이야기일까 하고 입을 다물게 되는 일이 잦았다. 물론 요즘은 전공대로 직업을 선택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인지도도 낮고 유명하지도 않은 공예라는 학문은 빠른 한국사회에서 더더욱 살아남기 힘들어 보였다. 나도 다른 동기들처럼 어서 취업준비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졸업전시 준비를 할 무렵, 학생들에게 한 교수는 최대한 많은 회사에 어서 포트폴리오를 제출하기를 요구했다. 일단 막무가내로 넣어보고 좋은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기업 공고만 무작정 뒤적여보다가 불현듯 아무런 열정과 목표 없이 나를 뽑아주는 아무 회사에 가서 어떤 일을 하게 된다한들 그게 내 20대의 목표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인생일까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며칠 전에 본 한 명품 브랜드의 2020 S/S 런웨이가 떠올랐다. 디자이너는 갖가지 식물에서 채취한 염료로 멋진 런웨이를 꾸미고 있었다. 천에 찍어낸 식물에서 예상치 못했던 색감이 발현되고 또 화학적 공정을 거친 염색이 아니라는 점, 너무 좋아하는 식물을 두고 작업할 수 있다는 점들에 매료되어 나는 그날부터 졸업전시의 주제를 조금 바꾸기로 했다.


커리큘럼 내에서도 염색은 인기 있는 과목이 아니었다. 염색 수업은 새내기 때 화학염료로 홀치기 하는 방식만 조금 배울 수 있었다. 더더욱 비효율적이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천연염색 과정은 학교에서는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갖가지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외국 명품 브랜드에서 본 영상에서 관심이 시작되었지만 우리나라의 장인들이 하는 천연염색은 더더욱 멋진 빛깔을 냈다. 젊은 사람들이 하는 천연염색 영상은 잘 없었기 때문에 편하고 빠른 자막과 편집에 익숙해진 젊은이인 나는 질릴 만큼 낡은 영상 속 과정을 쳐다보고, 학교 도서관에서 서적을 찾아 읽고 재료를 구해서야 겨우 시도할 수 있었다.




_MG_8297.jpg 90cm X 90cm, 유칼립투스로 실크에 염색 ( 이 작업은 나뭇잎의 형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이리저리 홀로 연구를 하고 교수님께 시간을 벌었다. 인턴을 하는 동기들은 서서히 자리를 비웠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하지만 식물을 만지며 천 작업을 하는 동안은 편안한 마음으로 작업했다. 내가 나열하는 식물이 천과 만나 반응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즐거웠다. 졸업을 무사히 하고 나서 처음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막연히 취업을 준비하고 싶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작업실을 구했다. 조금만 마음 편히, 조금만 천천히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할 유예기간을 나에게 주기로 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이 모습들을 소개하고 싶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이 시대의 모든 것들 사이에서 조금 더 느리게, 여유롭게, 단정한 빛깔로.




IMG_9751.jpg 30cm x 30cm, 면에 장미잎과 머위로 염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