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물든다는 점에서는 사랑과도 비슷합니다.

by 이나라





11월, 고군분투하던 졸업전시가 끝나고 길고 길었던 학교 생활의 막이 내리기까지 두어 달의 유예기간을 얻었을 때였다. 꾸역꾸역 잡고 있던 취업준비를 미뤄둔 채 작은 방에서 혼자 염색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천연염색은 정말 까다로운 작업임에 틀림없었다. 첫째, 재료를 구하는 것에 애를 먹었다. 치자나 소목, 빈랑(야자나무과 식물 빈랑의 잘 익은 씨를 말린 것)같은 재료는 천연염색재료를 모아놓은 온라인 사이트나 재래시장 깊은 곳 낡은 약재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꽃은 생각보다 구하기가 까다로웠다. 차도 없고 서울에 살지도 않는 터라 새벽에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고속터미널 꽃시장까지 가서 두 팔이 떨어지도록 꽃을 안고 사 와야만 했다. 그렇다고 그곳에 필요한 꽃이 반드시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엔 차라리 직접 찾아 나서자, 하고 뒷산을 헤집어 야생화나 풀을 조금씩 채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둘째, 변수가 많았다. 화학염색은 가루를 조금 섞어 푼 뜨거운 물에 휴지로 조금씩 농도 확인을 한 후 색을 입히면 됐다. 반면에 천연염색은 재료에서 색감이 나올 때까지 뜨거운 냄비에서 짧게는 30분, 길게는 2~3시간을 끓이고 철, 백반 등 재료에 따른 매염제를 잘 선택해야 한다. 또, 정련된 천의 재질이나 온도, 매염제에 따라 색감이 미세하게 달라진다. 조금이라도 눈을 떼고 손을 쉬면 얼룩이 지기 때문에 온전히 집중해서 지켜봐야 한다. 셋째, 영원한 건 없었다. 우리가 평상시에 구매해 입는 색깔 있는 옷은 표백을 하지 않는 이상은 처음 구매했을 때와 색감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한 번은 유칼립투스 잎으로 염색했던 천을 커튼 대신 창가에 매달아 두었었는데, 잊고 지내다가 문득 시선을 두니 오랜 시간 햇빛과 바람을 맞아 진하게 고착되었던 진한 고동색이 아쉬운 연한 암갈색을 띠고 있었다.


문득 그런 나를 지켜보던 연인이 본인은 이제 손이 잘 가지 않는 옷이라며 한 번 시도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울 소재로 된 하얀 니트를 내밀었다. 사실은 겁이 났다. 별 거 아닌 시도였지만 아마 이 세상에서 소심함으로 줄을 세우면 100명 안에는 거뜬히 들만한 성격의 소유자인 나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얼룩이 심하게 남아 내가 이 사람의 옷을 망치면 어쩌지'

'아직 입는 옷에는 해본 적이 없는데.. 연인의 몸이 주황색으로 물드는 것 아닐까?'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입을 옷에 내가 직접 만드는 색깔을 입혀주는 것만큼 멋진 일이 또 있겠는가. 마음을 너끈히 먹고 나서 옷을 깨끗이 빨고 따뜻한 물에 백반으로 매염을 해둔 후, 냄비 두 개에 물과 치자, 소목을 따로 넣었다. 치자는 아주 빠른 시간에 노란 물이 나오는데 비해 붉은빛을 내는 소목은 비교적 시간이 오래 걸린다. 붉게 물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동안은 또한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 생각을 했다. 애타고 걱정되는 마음처럼 노랗고 붉은 물을 합치니 한 여름에 만발한 능소화가 떠오르는 주황색 염액이 준비되었다. 매염이 된 흰 옷은 물에 담근 후 한참을 주물러주고 물이 잘 들면 맑은 물에 다시 한번 수세한다. 걱정되는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 담아 바람이 잘 드는 곳에 말려준다. 잘 마른 니트는 생각보다 아름다운 색감으로 완성되었다. 밝은 나무가 떠오르는 그 사람의 피부톤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자연으로 하는 염색은 그런 점에서 사랑과 닮아있다. 재료에 적응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틀어지고 아주 영원한 색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똑같은 모습으로 다량생산이 가능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래서 유의미하며 인간적이다. 사랑하는 마음처럼 천천히 그러나 아름답게 스며들어 나에게 맞는 마음의 색감과 향기로 남는다는 점에서 이 행위를 여전히 사랑한다.






IMG_9827.JPG 양모에 치자와 소목으로 염색 (청바지 제외)



매거진의 이전글천천히 스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