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게 여여하다.

by 이나라



올해 2월에 졸업을 하고 나서는 생활비와 갈망하는 천연염색 작업을 위해 전공을 살린 회사 취업보다는 적고 스케줄이 유연한 아르바이트 일을 해야만 했다. 대학생 때부터 오랫동안 나의 생계를 책임져주던 SPA 브랜드 아르바이트에는 더 이상 흥미가 없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고조되는 불협화음에 지쳐가던 찰나, 친구 한 명이 함께 일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큰 기업에서 만든 백화점 라이프스타일 편집샵 브랜드랬다. 나 역시 염색 작업으로 그런 것들을 만들고 싶기에 이름만 대면 알만한 다양한 브랜드를 공부할 수 있었고 위치도 가까워 통근시간이 30분이나 단축되니 이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성급하면 일을 그르친다고 했던가, 어리석은 나는 그걸 삶에 대입하기엔 아직 미숙했다.



확실히 그때의 나는 아주 급했다. 점장님께 빠른 퇴사를 부탁해 도망치듯 그곳을 나와 면접을 보고 쉼 없이 거의 바로 그쪽으로 출근했다. 알고 보니 난 직원이 아닌 샵의 보조 매니저로 근무하게 될 예정이었다. 이전에 일하던 보조 매니저는 돌발 퇴사를 했다고 했지만 조금 근성이 없는 사람인가 싶었고 일은 그냥 직원보다 많지만 그만큼 월급을 더 주니 오히려 괜찮았다. 하지만 위험은 다른 곳에 있었다. 첫 출근 날, 짧고 가는 촉으로도 그 사람을 만난 첫날부터 선명하게 알았다. 지금 내 눈앞에 매장을 끌고 있는 매니저라는 사람은 내 일상에 작더라도 반드시 스크래치를 남길 사람이라는 걸.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 매니저는 말을 자연스레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공적인 일터에서 '언니'라는 구닥다리 호칭으로 스스로를 칭했다. '언니'는 타당한 이유 없이 매일 기분이 나빴다. 그러면 출근인사는 물론 꼭 필요한 이야기에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입도 다물었다. 함께 있는 그 백화점 5층에서 나는 그 자리에 자주 없는 사람이 되었다.



악몽 같은 수많은 일들을 생략한 3개월이 지나가는 시점이었다. '언니'는 날 좋아했다. 타고난 성실함과 소심함으로 뭐든지 열심히 했고 쉽게 싫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버틸 수 있었다. 머리를 때리고 작은 실수에도 과한 화를 내고 험악한 욕설을 내뱉고 휴무에도 오는 무수한 연락들에도 애인은 내 마음을 알아주고 함께 스트레스를 나누었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좋아하던 염색 작업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연초에 계약했던 작업실보다 내 방 이불속에 있는 일이 잦아졌다. 머리는 쉼 없이 아파왔고 원래 얕게 앓았던 불면증이 결국 날밤을 새우게 하니 월경은 미뤄지고 자주 체했다. 누구를 만나도 내일의 출근 생각에 온전히 행복할 수 없었다. 혼자 매장을 열고 출근했던 어느 아침, 그녀가 미리 적어둔 할 일이 보였다. 그리고 며칠 전에 그녀가 나에게 던진 가위도 보였다.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처음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열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퇴사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후,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작업실에 도착해 묵혀둔 쑥을 꺼냈다. 리넨 천에 철 매염을 충분히 한 후, 말려진 쑥을 깔았다. 펼쳐진 잎으로 하면 훨씬 선명하게 나오지만 말린 식물은 나름대로 정형화되지 않은 독특한 모양을 낸다. 깔고 나면 천을 돌돌 말아 최대한 세게 고정시켜 묶은 후, 찜기에 쪄내면 된다. 기다리는 2~3시간은 명상의 시간에 가깝다. 쑥에 대해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보자.. 쑥의, 효능. 지혈작용을 하고 해열, 해독 구충 작용을 하고, 혈압강화와 소화 촉진, 소염작용.. 쑥의, 꽃말은.. '평안'..



평안이라. 요즘 나에게서 가장 먼 단어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차 한잔 내려마시며 책을 읽고, 반려동물과 산책을 한 번 하고, 좋아하는 채식 식단으로 적당히 밥을 먹고, 공원에 가서 그림을 몇 장 그리고, 좋아하는 음악을 엮은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미술용어를 찾아보고 블로그를 정리하던, 나의 평안은 사라졌다. 평온하며 평안하라는 말을 많이 해주던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괴로운 일이 닥치는 순간에도 스스로를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도처에 깔려있는 두려움을 마주한 채 깨끗이 씻고 향기 나는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글을 썼다.


"열심히 걷고 걷다가 정말 힘들면, 그냥 피해. 막 이기려고 용감해지지 말고 가끔은 그냥 져. 순순히 지고 나서 다시 너를 가다듬고 일어나. 대단해지려고 하지 말고 그냥 너로 보내는 하루를 채우면 좋겠어."


가만히 친구가 했던 말을 생각하면서 염색된 천에서 쑥을 하나하나 떼어내기 시작했다. 철 매염을 해 어둑한 빛깔로 물든 쑥에선 진한 냄새가 났다. 쌉쌀하고 독특하지만 그래서 평안한 쑥다운 냄새. 친구의 말처럼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이 작업처럼 필요한 만큼의 평안한 감정으로 하루를 물들이기로 한다.


60cm x 60cm, 리넨에 쑥으로 염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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