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켰을 때 이미 영화는 방영되고 있었다. 낯익은 흑인 배우가 택시 운전사를 연기하고 모르는 여자 연기자가 택시 승객으로 출연 중이었다. (나의 무지를 용서하시라. 흑인 배우의 이름은 제이미 폭스이고, 여자는 제이다 핀켓 스미스였다.) 여자는 L.A의 유능한 전문직인 듯 보이고 차 안에서도 일처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택시의 경로 문제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짧은 논쟁이 벌어지고, 예상치 못한 논쟁은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유능한 검사가 평범한 택시기사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넨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뭔가 마음에 흔들림을 주었다는 뜻인 것이다.
나는 영화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었으므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대도시 L.A를 배경으로 두 흑인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하려나? 어떤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영화의 분위기는 좋았다. 좋았다는 것은 뭔가 핵심적인 정서를 잃지 않고 끌어 나간다는 뜻이다. 뭐랄까, 대도시의 야경이 주는 향락적인 아름다움과 인물들이 풍기는 낙엽 같은 건조함과 쓸쓸함이 잘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여자가 내리고 잠시 후 백발의 남자가 택시에 올랐다. 그 남자는 톰 크루즈였는데, 나는 처음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백발이 낯설기도 했지만, 마침 그때 여행 갔던 딸이 집에 도착해서 TV에 집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딸은 대학 합격도 축하할 겸, 친구들과 처음으로 외국여행을 다녀온 중이었다. 나는 영화가 궁금했지만, 딸의 도착을 반기는 것이 더 중요했다. 더군다나 딸은 지금 오사카에서 오는 길이고, 오사카는 누구나 알고 있는 간식의 천국 아닌가?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딸이 오사카 간식을 사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이도 닦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딸이 더 중요하고, 달콤한 간식이 더더 중요하다.
현실은 내 예상대로 달콤했지만 영화는 그렇게 진행되고 있지 않았다. 새로운 택시 승객 톰 크루즈는 전문 킬러였고, 평범한 택시기사 제이미 폭스는 그에게 저당 잡혀 끝을 알 수 없는 아수라장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영화는 천사들의 도시 L.A, 그 천국 같은 야경을 열고 들어가면서 한 꺼풀 두 꺼풀 지옥도 같은 이면을 그려나갔다.
어떻게 보면 뻔한 설정의 뻔한 전개, 뻔한 결말의 흔한 대중 오락영화였다. 콜래트럴... 제목을 들어본 적은 있으나 나는 이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내가 오락영화를 즐겨보지 않기도 하거니와, 이 작품이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않은 것도 이유일 수 있다. 같은 부류의 액션 오락영화라고 해도, 나는 <다이 하드>나 <제이슨 본> 시리즈 같은 영화는 재미있게 봤고 좋아한다. 변명 같지만, 오락영화라고 해도 좋은 영화는 찾아본다는 얘기다.
킬러는 쓸쓸하게 죽고 택시에서 처음 만났던 두 흑인 남녀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났다. 늦은 밤. 영화는 끝이 났으나 내 마음속에서 영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영화는 끝남과 동시에 죽어버린다.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잠시 착각을 일으키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생하게 리얼한 느낌을 주더라도 그때뿐이다. 가짜인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콜래트럴>이라는 이 단순한 액션 영화는 웬일인지 죽지 않고 내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 작품이 ‘예술작품’이라는 말이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콜래트럴>이 예술작품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런 말을 하면 나는 바보가 된다. 내가 바보라는 것을, 영화 보는 눈이 형편없다는 것을 광고하는 꼴이 된다. 나는 일단 나의 반응을 무시하기로 했다.
세상은 변했다. 변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해갈 것이다. ‘영화는 예술’이라고 하면 비웃음을 사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모두가 각자의 취향대로 영화를 소비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소비재일 뿐이다. 먹고 치워버리는 디저트 같은 것이다. 더 나쁘게 말하면 시간 때우기 용으로 소모되고 있다. 내가 딸이 선물 삼아 사온 초콜릿을 먹기 위해 영화보기를 포기했던 것처럼, 영화는 이제 사소한 일상의 곁가지 즐길거리에 불과할 뿐이다.
심심치 않게 천만이 넘는 흥행 영화가 나오는 것을 보고 내가 놀라면 우리 여편은 항상 타이르듯이 내게 말한다. 천만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두지 말라고.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의 여가시간을 즐기기 위해 그 시간에 맞는 영화를 선택하는 것뿐이라고. 영화의 좋고 나쁨과는 상관이 없다고.
인정한다. 흥행은 귀신도 모른다는 게 업계에서 흔히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만이라는 숫자는 잘 적응이 안된다. 천만이 아니라 오백만도 대단한 숫자다. 아니 백만도 막상 닥치고 보면 넘기 힘든 넘사벽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군다나 하루 방문객이 몇십 명에 불과한 나 같은 가난한 변두리 골목의 이름 없는 블로거에게는 꿈에서도 불가능한 숫자인 것이다.
그래서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영화를 소모품으로 보는 태도에 대해, 세상이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에 대해,
그러다가 아주 가끔 괜찮은 영화를 만나기도 한다. 얼핏 생각나는 바로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Arrival)>(2017년. 미국), 일디코 엔예디 감독의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On body and soul)>(2017년. 헝가리) 같은 작품들. 이런 영화들을 보면 흐릿하던 정신이 번쩍 상쾌해지는 것을 느낀다. 딸이 사 온 초콜릿보다 더 상큼하다.
<콜래트럴>이 나를 자극한 방식은 앞의 작품들과는 또 달랐다. 드니 빌뇌브는 영화적 기교가 뛰어나기로 이미 정평이 난 감독이고,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공인된’ 작품이다. 나는 두 작품의 시청각적 서술방식이 마음에 들었는데, 영화가 시청각적 예술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하는 그런 영화들이었다.
두 작품이 영화적 언어로 나를 매혹시킨데 반해 <콜래트럴>은 보다 은근하고 깊게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두 영화에 비해 <콜래트럴>의 영화적 기법은 평범했고, 소재나 내용 역시 흔한 대중 오락영화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왜 나를 자극하고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콜래트럴>이 기분전환용 디저트가 아니라는 뜻이다. <컨택트>나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같은 즉각적 효과의 영화가 아니라, 밥이나 스테이크 같은 주식이라는 뜻이다. 일회성으로 소모되지 않고 계속 내 마음에 살아남는다는 것은 이 영화가 소비재가 아니라 생산재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뭔가 내 마음속의 근본적인 것을 건드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 내가 대강 봐서 놓친 뭐가 있나?
나는 <콜래트럴>에 대한 리뷰를 알아보려고 인터넷을 열었다. 전문가 평점을 보니, 평점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모 평론가가 별 두 개 4점을 주었다. 대체로 별 세 개 6점을 ‘무난한 평균작’이라고 봤을 때, 별 두 개면 ‘웬만하면 보지 마세요’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한두 개 더 인터넷 리뷰를 찾아보는 중에 ‘이런 짓 그만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간에 선호도의 차이는 있어도 리뷰의 결론은 비슷했다. 그저 그런 액션 오락영화라는 평가. 주인공이 톰 크루즈가 아니라면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점점 조바심이 났다. <콜래트럴>을 옹호하고 응원하고 싶어졌다. 보호하고 대변하고 싶어졌다. <콜래트럴>의 감독이, 작가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 그들의 전하지 못한 진심을 대신 얘기하고 싶어졌다. 그들이 나 마음에 전한 것이 무언지도 아직 확실치 않았지만, 그게 무엇이던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분명히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도 핵심적인 요소일 것이다. 나는 그게 뭔지 구체적으로 알아내기 위해서 영화를 다시 보기로 했다.
평범한 L.A. 의 택시 운전사 맥스(제이미 폭스 분)는 돈을 모아 리무진 렌털업을 하겠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살고 있다. 그는 어느 날 밤, 우연히 타지에서 온 승객 빈센트(톰 크루즈 분)를 자신의 택시에 태우게 된다. 빈센트는 하룻밤 동안 다섯 군데를 들러 볼일을 보고 새벽 6시까지 공항에 가야 한다며 택시를 전세 내자고 한다. 두 사람은 계약을 맺고, 맥스는 하룻밤 동안 빈센트의 여정에 동행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곧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빈센트가 말한 다섯 가지의 볼일이란 바로 사람들을 죽이는 살인청부 일이었던 것. 빈센트는 마약조직에 불리한 증언을 한 증인들과 담당 검사를 살해하기 위해 L.A. 에 온 청부업자였던 것이다. 맥스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지만 그럴수록 더 깊숙이 개입하게 되는데... (‘네이버 영화’의 줄거리를 인용함.)
맥스는 좋은 사람이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남에게 예의 바르며, 상대의 뜻에 거스르는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는다.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지만 종속적이다. 상대에게 맞추며 살아간다. 싸우기 싫은 것이다.
반면 빈센트는 나쁜 사람이다. 유능하고 단호하며, 확신에 차있고 상대를 믿지 않는다.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세상을 비웃는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에 죄책감이 없다. 영화는 그가 철학, 예술, 사회과학 등 모든 분야에 일가견이 있다고 설정하는 듯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그가 내놓은 결론은 이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꿈, 희망, 사랑, 기쁨 등의 단어는 공허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르완다 대학살에도 침묵한 자가 무명의 한두 사람이 죽었다고 웬 호들갑?’이라는 말은 그런 정신상태의 표현이다.
극단적인 두 사람이 하룻밤의 악몽을 함께 하면서 미묘한 변화를 겪는다. 서로 삼투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영화는 많은 시간을 두 사람이 택시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에 할애한다. ‘왜 사는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말하는 두 사람의 대화는 얼핏 ‘괜히 멋있는 척 폼 잡는’ 치기 어린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다. 상반되는 두 캐릭터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서로 영향을 미치는 구조 역시 흔히 보는 이야기 형태이다.
나는 특히 영화의 끝부분 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여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애니(제이다 핀켓 스미스)를 너무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처리한 것이 불쾌했다. 영화 초반 그렇게 적극적이고 유능한 검사 캐릭터로 보이더니, 하이라이트 상황에서는 맥스와 빈센트의 들러리 역할만 하고 끝난다. 아무리 두 남자 중심의 남성영화라고 해도, 이런 식의 여성 인식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진부한 부분이었다.
앞의 줄거리 소개부터 여기까지가 겉으로 드러난 <콜래트럴>의 내용이다. ‘겉으로 드러난’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 <콜래트럴>이 말하고자 하는 진짜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럴 듯 해 보이는 빈센트의 독설, ‘우리는 광대한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 라거나 ‘인생은 짧다. 꿈꾸지 말고 행동을 해라’고 말하는 것은 영화 이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다. 소재를 정했을 때, 두 주요 캐릭터를 설정할 때 이미 그런 말을 하게 되어있었으며, 시나리오 단계에서 점검되고 다듬어져 있던 것이다.
주제는 ‘소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전문적으로 영화감상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간략히 두 가지로 구분해서 말하려고 한다. 하나는 정서적 측면이고, 또 하나는 의미적 측면이다.
먼저 정서적 측면. ‘Atmosphere’라는 용어가 있다. 쉽게 ‘분위기’ 정도로 이해되지만, ‘영화의 내용을 표현하는 정서’라고 이해되는 게 맞다. <콜래트럴>의 atmosphere는 ‘쓸쓸함’이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가 바로 이 우울한 쓸쓸함이다. L.A의 야경이나 사람들의 모습이나 주인공을 보여줄 때 항상 이 정서가 깔려있다. 이 정서는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우리의 마음을 적시는데, 내가 <콜래트럴>을 보고 나서도 마음의 작동이 멈추지 않았던 이유도 그 정서에 감응되었기 때문이다. 부연해서 설명하면, ‘난 무관심해. 우주의 미아지’라고 말의 그 의미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말을 하는 마음의 우울함과 쓸쓸함이 중요하고, <콜래트럴>은 그것을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말이다.
행동은 정서를 유발하고, 정서는 의미를 생성한다. ‘그가 총을 쏘았다’고 할 때, 그 행동의 정서도 중요하고, 그 행동과 정서에 부합하는 의미가 동반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콜래트럴>에 그려진 이야기의 우울함과 쓸쓸함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영화는 상반되는 두 가지를 대비시키며 진행된다. 감정 없는 킬러와 소심한 택시 운전사. 아무 일도 없는 듯 일상을 즐기는 대중들과 그 이면에서 피의 거래를 나누는 어둠의 사람들. 움직이는 것들과 정지해있는 것들. 꿈과 현실. 안정과 변화. 고립과 연대, 단절과 소통, 준수와 위반, 계획과 실제. 우연과 필연. 예정된 것과 즉흥적인 것. 진실과 거짓 등등...
상반되는 두 가지 요소들은 각기 단절되어 흩어지고 부서진다. 서로 교통하지 못한다. 우주를 떠도는 미아처럼, 어두운 도시 거리를 서성이는 코요테처럼 혼자의 길을 간다. 혼자여서 쓸쓸하고 함께 하지 못해서 우울하다. 대도시 L.A의 풍경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무심하지만 점점 그 감정은 겹겹이 쌓여간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도시 속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소통하는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L.A 지하철에서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빈센트의 입을 통해 두 번 반복되는데, 그것은 L.A 도시 스케치와 더불어 우울한 쓸쓸함의 징표다.
그러한 기본 정서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두 주인공이 변화한다. 서로 반대편의 방향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다. 사실 두 사람은 고정된 사람들이다. 맥스는 변화를 꿈꾸지만 행동하지 못한다. 빈센트는 변화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어차피 우리의 삶은 의미 없는 것이니까 굳이 변화를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옆자리의 사람이 죽어도 관심을 못 받는 이 세상에서, 그까짓 사소한 변화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그는 세상에 대해, 세상 사람들에 대해 애정이 없다. 좋아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은 내동댕이쳐진 존재이고, 어느 순간 수세식 변기의 똥덩어리처럼 씻겨 내려갈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맥스는 행동하기 시작한다. 택시회사 사장에게 하찮은 욕도 못하던 소심함이 암흑가 보스에게 빈센트인 척하며 큰소리치는 대범함으로 변한다. ‘택시 한 대만 있으면 되는’ 간단한 꿈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던 사람이 자신의 택시를 무한 질주시키고 빈센트를 태운 채 굴려버린다. 총을 쏠 줄도 모르던 맥스가 백발백중의 전문 킬러 빈센트에 맞서서 결국 이기는 결말은 기적적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것이다.
그리하여 맥스는 이제 행동하는 사람이 된다. ‘콜래트럴(collateral)’이라는 단어가 ‘담보물’ 혹은 ‘부수적인’이라는 뜻이라고 할 때, 이제 비로소 담보를 벗고 주체적인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자신을 담보 잡았던 빈센트의 강력한 추궁을 물리치고 자유를 획득한다. 영화는 끝나지만 맥스는 이제 막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중이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당장 누군가 또 맥스를 저당 잡으려 할 것이고, 맥스는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할지 모른다. 또 아수라 같은 상황을 맞게 될 수도 있다. 맥스가 주체적인 삶을 시작했다고 해서 지옥 같은 현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정당한 타협과 공정한 판결 대신 피 묻은 뒷거래가 판치는 현실은 여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계속 ‘콜래트럴’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사람 없는 지하철 어느 자리에서 쓸쓸히 죽어가면 안 된다. 밤거리를 배회하는 코요테처럼 고독해서도 안된다. 그건 사람의 삶이 아니다. 맥스는 빈센트에게 말한다.
“사람 마음속엔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게 있는데, 당신은 없어요.”
지옥 같은 하룻밤의 경험을 통해 맥스가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빈센트에게는 없고, 코요테에게도 없는 것이 자신에게는 있다는 것!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 이것은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기준이 된다. ‘집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집의 소유 여부는 절대적 판단기준이다. ‘연봉 얼마’가 중요한 사람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게 된다. 자존감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맥스는 빈센트를 반면교사로 삼아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를 존귀해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아니다. 빈센트는 맥스의 반면교사가 아니라 스승이다. 정말 이상하게도, 빈센트는 시종일관 맥스를 아끼고 용서하고 배려하고 관여하고 가르친다. 몇 번을 죽여야 하는 상황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맥스와 함께 한다. 어미 사자가 새끼 사자를 낭떠러지에서 떨어트리듯이, 빈센트는 맥스를 필릭스에게 보낸다. 정해진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맥스에게 죽음을 담보로 변화하도록 유도한다. 맥스는 그 가르침대로 변화하고 습득하면서 결국 빈센트를 극복하고 홀로 선다. 강하고 나쁜 남자 빈센트는 왜 맥스에게 관대하고 좋은 남자로 행동했던 걸까? 이 이상한 아이러니는 <콜래트럴>의 기본 정조 ‘우울한 쓸쓸함’과 어울려서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맥스는 빈센트의 ‘콜래트럴’이 아니다. 빈센트는 맥스의 감정적 아들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지키고 가르치고 길러야 한다. (맥스는 자기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농담 삼아 말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죽일 수 없다.
그러면 ‘사람 마음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영화의 기본 정조 ‘우울한 쓸쓸함’은 그것이 부재함에서 비롯된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보이는 L.A의 야경 역시 그것이 부재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증명사진이다.
여러 단어가 떠오른다. 교감, 배려, 이해, 소통, 함께 하기, 사랑... 어떤 단어를 선택해도 무난하지만 나는 ‘소통’ 혹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다. 영화 <콜래트럴>은 소통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 냉혹한 킬러 빈센트와, 소통에 서툴고 회피적인 소심한 택시 운전사 맥스가 서로 소통하고 불화하다가 파국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글을 쓰면서 인터넷 자료를 살펴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콜래트럴>을 좋게 이야기하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정도면 굳이 내가 나서서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나는 이미 택시에 올라탔고, 일단 출발한 이상 다섯 명의 목숨을 거둘 때까지 목적지를 달려야 한다. 세상 모든 일은 시작도 끝도 예상대로 되지 않는다. 매 순간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고, 변화와 즉흥을 당연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맥스의 말마따나 살다 보면 별일 다 있게 마련이다. 그렇구나, 적응하고 살아야 한다.
맥스와 빈센트가 나누는 대사들, 인생론 같은 것들이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 같다.(일부는 그것 때문에 지루하다고도 한다.) 내가 <콜래트럴>을 옹호하는 이유는 그런 표면적인 것들이 아니라, 영화의 핵심이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핵심, 내가 코어(Core)라고 말하는 <콜래트럴>의 핵심 주제어는 ‘소통’이다. 코어가 얼마나 시종일관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느냐에 따라 작품의 우열이 결정된다. 가끔 소금 덩어리가 보이는 엉성한 소금물이 아니라, 소금 덩어리가 보이지 않아도 항상 짠맛을 잃지 않는 바닷물 같은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말이다.
빈센트는 킬러다. 킬러는 불통의 대명사다. 상대와 통할 필요도 없고, 통하면 안 된다. 그에 반해 택시 운전사인 맥스는 상대와 통해야 한다. 승객이 원하는 장소에 데려다줘야 하므로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두 인물이 만나서 케미스트리가 발생한다. 소통과 불통을 오가며 극적인 변화를 이루어낸다.
얼핏 맥스가 소통을 잘하는 인물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택시 안에 갇혀있다. 택시 안에서는 소통을 잘하고 주인공이지만 택시 밖의 세상과는 단절되어 있다. 오히려 빈센트보다 더 불통이다. ‘승객들이 내리기 싫어할 만큼’ 택시 안을 천국처럼 만들겠다고 말하지만, 영화는 그 말이 얼마나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꿈인지 보여준다. 빈센트는 맥스가 현실도피적인 택시를 벗어나도록 하는, 맥스를 세상으로 견인해내는 역할을 한다. 빈센트가 하는 택시 안에서의 소통은 거짓 소통이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혹독한 선생이다.
빈센트는 가기 싫다는 맥스를 앞세워 맥스 엄마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간다. 맥스와 엄마는 불화하고, 빈센트와 맥스 엄마는 화목하다. 불통과 소통의 역할이 뒤집혀 있다. 그에 더해서 맥스가 엄마에게 리무진 회사에 대한 거짓말을 한 것이 드러나고, 맥스는 발작적으로 빈센트의 가방을 들고 달아나기 시작한다.
(이 대목은 사실 해석이 모호한 지점이다. 빈센트가 왜 병원에 가자고 했는지, 맥스가 왜 가방을 들고뛰었는지 분명치 않다. 두 사람의 캐릭터에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영역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변화의 확실한 증거이고, 즉흥이다.)
나는 맥스가 자신의 거짓말이 드러난 것에 대해서 히스테리컬 한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본다. 리무진 택시를 운영한다는 것은 맥스가 항상 말하는 자신의 꿈이다. 12년째 임시직을 한다고 빈센트는 비웃지만, 맥스는 리무진 택시를 꿈꾸며 잘 버텨왔다. 엄마한테는 그게 꿈이 아니라 실제인 것처럼 말했지만, 그게 무슨 잘못인가? 맥스가 어떻게 살아가건, 엄마는 걱정하고 참견하고 잔소리하는 게 일이다. 그 재미로 살아가는 것이다. 꿈이건 사실이건 상관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맥스는 다르다. 그의 생활은 잘 정돈되어 있다. L.A 시내의 도로 상황에 대해서는 1분도 틀리지 않게 정확히 안다. 현실이 고단해도 그는 적당히 꿈에 의지해서 잘 살아왔다. 정 힘들 때는 몰디브 섬 사진을 보며 자신을 달래기도 한다. 사는데 아무 문제없다.
그러나 꿈은 꿈일 때 힘을 갖는다. 꿈은 현실 앞에 나오면 힘을 잃고 초라해진다. 맥스는 ‘그건 꿈이 아니라 나의 미래’라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미래도 현실 앞에서 앙상하기는 마찬가지다. 행동하지 않는 모든 것은 가짜다.
한번 파도에 속절없이 부서지는 모래성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맥스의 세계가 빈센트 앞에 드러나는 순간 무너져버렸다. 맥스는 그걸 견딜 수 없다. 엄마가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것보다, 맥스 자신의 세계가 그렇게 쉽게 허물어지는 것이 싫다. 부끄럽고 혐오스럽다. 그래서 맥스는 발작적으로 자기 파멸의 길을 간다. 그리고 그것은 맥스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기회가 된다. 항상 새로운 세상은 행동하는 자의 것이다.
아! 내가 말하려는 결정적 장면은 이게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모든 상황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영화 <콜래트럴>의 시작과 끝을 감당하는 출발점이 어디일까? 그것은 영화의 도입부, 애니가 택시에 타고 있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맥스와 애니는 택시의 경로를 두고 짧은 논쟁을 벌인다. 다른 승객들과 대화가 없던 것과 구별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맥스가 택시 운전사로서 전문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회도 된다.
“손님이 원하는 대로 가야죠.”
이게 맥스의 자세다. 그러나 맥스는 더 빠른 경로를 제안하고, 자신이 틀리면 택시비를 받지 않겠다는 내기를 한다. 애니는 자기 말대로 했으면 “5달러는 더 벌었을” 기회를 마다하고 빠른 길을 고집한 맥스에게 호감을 느낀다.
애니; 하는 일에 자부심이 강한가 봐요?
맥스; 이거요? 임시직이에요. 일단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죠. 따로 계획이 있지만요. 사업계획 ...아일랜드 리무진. 클럽처럼 유쾌한 차 속의 섬이랄까?
이건 이상한 대화다. 애니가 칭찬하는 말을 하자 맥스는 훌쩍 뒤로 물러난다. 분명히 탁월한 전문성을 보이며 훌륭하게 택시 운전사의 일을 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임시직이라고 비하하는 말을 한다. 더 멋지게 보이려고 리무진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초라한 군더더기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꿈속에, 아일랜드 리무진 사업 속에, 몰디브 섬 전경을 보여주는 사진 속에 숨어 현실을 도피한다. 정직한 소통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맥스; 직업에 만족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렇게 소극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맥스가 애니에게 적극적으로 질문을 한다는 사실이다. “손님이 원하는 대로 가야죠.”라는 말처럼 그는 상대방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사는 게 맞다. 괴로운 일이지만, 그러면 그는 꿈으로 도망가면 된다. 몰디브 섬 사진을 보며 잠시 위안을 얻으면 된다. 그런 그가 적극적으로 질문을 한다는 것은 뭔가 소통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진단과 처방까지 서슴지 않는다.
맥스; 휴가가 필요하군요. 휴식을 취하며 자신을 되찾고,..
그리고는 선뜻 자신의 비밀스러운 도피처, 몰디브 섬 사진을 내어준다.
맥스; 몰디브 섬. 저만의 비밀 휴양지죠. 일이 너무 힘들어지면 5분 동안 섬에 찾아가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구요. ...저보다 더 필요하신 것 같으니 사양 말고 받아요. 정말 도움이 돼요.
맥스의 성의를 받아들인 애니가 내린 후, 맥스는 고개를 저으며 후회하는 심리를 내보인다. ‘내가 왜 그랬지?’ ‘정신이 나갔어.’ 뭐 그런 마음일 것이다. 영화의 주요 모티브 중 하나인 ‘우연과 즉흥’이 발동했던 것이지만, 맥스는 아직 그것의 마법을 모른다. 그는 정해진 일과를 살며 자신의 세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는 택시 밖의 세계에, 세상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 시간이 남으면 단어 맞추기 퍼즐이나 하며 지낼 뿐이다.
맥스가 자책하고 있을 때 애니가 다시 돌아와 자신의 명함을 건네준다. 별 것 아닌 장면 같지만, 내가 주목하는 결정적인 장면이 바로 여기다. 맥스가 애니에게 준 몰디브 섬 사진과, 애니가 맥스에게 준 명함... 이 작은 소통이 결국 역사를 만든다. 차가운 단절의 도시 L.A, 소통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냉혹한 킬러 빈센트를 물리치고 살아남은 것이다.
애니를 내려주고 빈센트를 태운 뒤 맥스의 택시는 L.A 밤거리의 급류를 달리기 시작한다. 이름 없는 택시 운전사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점점 커져서 도시의 이면 세계와 경찰, FBI, 검찰 등의 정부조직까지 망라된다. 그러나 정작 급류의 중심에 있는 빈센트는 태연하다. 차분히 정해진 자신의 일(살인)을 해나갈 뿐이다. 죄책감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막강한 정부도 그를 이기지 못한다. 맥스가 변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빈센트; 수백만 은하계와 수천만의 별들 중 한순간 반짝하는 점 하나... 그게 우리야. 우주의 미아지.
잘난 척하며 맥스에게 설교했지만 결국 맥스의 서툰 총에 맞아 죽는다. 빈센트는 틀렸다. 얼핏 보면 반짝하는 점 하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거대한 행성이고, 미아인 것 같지만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면 집단이 된다. 바람 불면 흩어지는 먼지 같은 개인들이지만, 그들이 모여서 바위가 되고 대륙이 되고 지구를 만든다.
‘영화니까 가능한 일이야.’라고 말하고 싶은가? 실제로는 맥스가 빈센트를 이기는 따위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가? 맥스의 말처럼 ‘언젠가는 꿈이 이뤄질 거라고? 착각이야.’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는 영화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놀라운 일들이 항상 일어난다. 그리고 그러한 긍정적 결과는 믿음과 소통과 연대에서 시작한다. 맥스가 자신의 소중한 사진을 애니에게 기꺼이 준 것처럼, 그 마음이 통해서 애니가 자신의 명함을 맥스에게 준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자신의 마음 한 구석을 상대에게 내어줄 때 모든 기적은 시작된다.
우리는 ‘콜래트럴’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담보 잡으려는 모든 것들에 저항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주의 미아가 맞는 것 같아도, 악착같이 뿌리치고 우리가 주인공임을 되새겨야 한다. 내가 없다면, 우리가 없다면 길 건너 중국집은 어떻게 먹고살란 말인가? 방탄 소년단은 누굴 위해 노래를 하고, <나의 아저씨>의 아이유는 누가 봐준단 말인가? 우리가 아니면 이 작고 아름다운 행성 지구는 누가 지킨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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